Betty's Drama/글속愛빠지다

[사랑의 무게]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No.13

Betty1983 2012. 7. 8. 00:54

 

 

 

 

 

                                                                                                그대를 만난 어제가 꿈이라 해도,

                                                                                                                         나는 믿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사는 이 세상이,

                                                                                                  내게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을.

 

                                                                                                                       -Betty : 無題-

 

 

 

준우의 집무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분명 제가 아는 말인데,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쿵!!’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걸음질 치던 다은이, 책상 모서리에 제 팔을 박고 말았다.

고작 한 부분, 길디 긴 팔의 단 한 부위에 충격이 가해졌을 뿐인데, 격렬한 통증이 뼛속을

돌아다녔다. 마치 목소리가 울리는 동굴 속에 선 듯 팔 전체가 통증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잠시 제 팔을 잡고 그 자리에 굳어있던 그녀가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당신만 모르면 돼. 그럼 나 역시 모르는 거야.’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되밟아 가는 걸음걸음이 10분전, 아니 5분전으로 시계의 태엽을

돌려주리라 헛된 믿음이나마 품은 채로. 귓가에 쟁쟁한 ‘은우’라는 이름마저 지우고 싶었다.

‘뚝뚝’ 그녀는 눈물이 볼에 얼룩을 남길 수 없도록 연신 훔친다. 울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쏘아보던 부자의 불편한 대면은 문 밖에서 나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앞에 단 번에 종료 되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숨도 쉬지 않고 문을 열어젖힌 준우의

시선에 엉망으로 흩어 진 서류철과, 눈에 익은 여자의 가방이 멋대로 버려져 있었다. ‘설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미 진공상태가 돼 버린 머릿속에, 오직 다은의 얼굴만

떠다니고 또 떠다녔다.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았을까봐, 그래서 저를 떠나겠다고 선언할까봐

준우는 어느새 전전긍긍하며 문을 박차고 달린다. 아버지의 호통도, 짐짝처럼 지고 살아왔던

은우를 향한 죄책감까지도 모두 내던진 채로. ‘기다려. 내가 말해. 당신한테 내가 말할 거야.’

 

‘후우’ 어두운 주차장 안,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담기는 순간, 준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잔뜩 굳어졌던 미간을 풀었다. ‘뚜벅뚜벅’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여자를 향해 다가간 준우가

같은 자리를 서성대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을까. 그녀의 몸이, 그대로 자신에 안겨왔다.

 

“이제 왔어요? 오래 안 걸릴 거라면서요. 금방 돌아온다면서요. 난 당신 안 오는 줄 알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말을 잇던 여자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도 없이 오열하는 여자,

그저 제품에서 떨고 있는 여자의 작은 몸을 통해서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다은이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그저 눈물 밖에 나지 않을 만큼 아프다는 진실을, 준우도 알아버렸다.

 

“내가 애기할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 해줄게. 내가 다 이야기하고 또 다 안고 갈게.”

 

 

 

“아니라고, 모른다고, 이사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날 속인 적이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이사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저 그렇다고 믿을 거예요.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그러니까......“

 

찻잔을 사이에 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고 있었다. 스커트를 생명줄처럼 꼭 붙들고,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끝내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 모습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여자와 꼭 같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준우의 얼굴이 그 말에 따라 일그러져갔다.

 

아버지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날도 그를 위해 손수 녹즙을 갈던 어머니.

당신 명의로 된 주식을 하나씩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때도 모른 척 했던 여자.

아버지가 첫사랑을 만나고 다닌다는 보고를 받은 날 저녁에도 가든파티 장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팔짱을 꼈던 아내. 은우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변함없이 스킨케어를 받고,

늘 그랬듯이 즐겨먹던 스테이크를 잘라 삼키던, 저를 은우라 부르며 태연히 미소 짓던 엄마.

자신은 ‘준우’라고 소리라도 지르려하면, 어김없이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을 놓아버리는 그녀.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전히 자신으로 서기 위해, 처음으로 모든 것을 던졌던 사람,

죽은 첫사랑의 동생이 아니라, 그저 준우라는 남자로 서고 싶게 만들었던 여자가, 또 다시,

자신에게 거짓을 말해달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심을 굳힌 그가 감정을 숨긴 채 싸늘하게 그녀를 마주본다. ‘쿵!’ 그녀의 가슴이 떨어졌다.

 

“아니, 나 당신한테 거짓말한 거 맞아. 처음부터 형의 첫사랑인 거 알고 작정하고 접근했어.

죽은 우리 형, 은우 그 자식,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멋있잖아. 난, 그동안 은우 대용품으로

살아서 은우가 가졌던 거라면 뭐든 가져야 했고, 또 갖고 살았었지. 원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만! 제발 그만해요!!” 양쪽 귀를 틀어막은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준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반 강제로 두 귀를 막은 손을 때냈다.

 

“똑바로 들어. 우리 형, 당신 첫사랑 은우 죽었어. 뒤진 거 십년 됐다고!! 날 봐. 제대로 봐!!”

 

벌벌 떨다 못해 반쯤 패닉이 되어버린 여자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마주 보았을까.

그녀를 그러안은 그가 단호히 말을 쏟았다. “나 당신한테 사과 안 해.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최선?’ 남자의 마지막 말이 귓가로 틈입한 순간, 여자는 여지없이 몸을 밀쳤다. 허나 그녀의

힘으로 그를 완전히 밀어내기는 역부족이었고 가슴속에 가두려는 남자와 벗어나려는 여자의

격렬한 실랑이로 번졌다. 처음에는 품에서 몸부림을 치던 정도였지만, 남자가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려 잠시 몸을 떨어뜨린 사이, 작은 주먹으로 그의 온몸을 있는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거짓말이 최선이니?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야. 내가 얼마나 아파했는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빤히 보면서 속이고 싶었니? 아. 재미있었겠구나. 혼란스러워하는 나,

네 앞에서 흔들리는 나보니까 통쾌 했겠네.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난 그것도 모르고......“

 

제 감정에 취해 마구잡이로 말을 쏟던 여자가, 힘주어 잡고 있던 남자의 재킷을 놓아버린다.

‘터덜터덜’ 종전의 분노는 간데없이 여자는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우지만, 돌아온 건 힘없는 고갯짓과 제 손을 때내는 손길이다.

 

무표정을 넘어 넋을 놓아버린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그에게 더없는 고통이었다.

은우 애기만 나오면, 수도꼭지가 열린 듯 그치지 않던 눈물도 오늘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울어 이 여자야. 아까처럼 화를 내라고. 그래야 당신이 나를 보지. 그래야 잡아보지.’

 

“가지마. 가지마. 가지 말라고!! 당신은 형처럼, 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돌아서지 말라고!”

 

비명 같은 준우의 음성에 멈칫한 것도 잠시뿐, 다은은 입술을 깨물며 카페 문을 빠져나간다.

가지 말라던 음성이 여전히 귓가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을 그러안던 강인한 손길이

아직도 제 몸을 휘감고 있는 것만 같아서, 제 어깨를 잡아 돌려세울 때 설핏 마주본 남자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가슴이 저리게 그가 밟힌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괜찮다. 다 괜찮다.’ 말해주어야 할 것만 같다. ‘어쩜 난, 미쳐버린 걸까.’

 

‘처음에는 은우와 닮은 당신에게, 그 다음은 끊임없이 나를 깨우던 당신에게, 그리고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게 돼버린 마음에, 당신의 거짓을 눈감아서라도 당신에게 머물고자한 나에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빼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문득 다리가 아파왔다. 이 순간에도

살아있다고, 살아보겠다고 통증으로 쉬어야할 때를 알리는 제 몸이 우스웠다. ‘그래, 앉는다.’

사람 몸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다리의 통증이 가시자, 배가 고팠다. 목이 마른 것도 같다.

그제야 소스라치듯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텅 비어있는 제 손이 의식되었다. ‘돌아가야 하나.’

회사로 돌아가서 가방을 챙겨 나올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샌가 해가 기울어 인적이 드물어진 버스정류장과, 오늘 따라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 흔한 전화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지금이 세상과 분리된 듯 낯설고 두렵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제게로 찾아와 손 내밀어 준다면, 무엇도 따지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갈 것 같다.

그리고 그이가 당신, 준우였으면 좋겠다. 정말 미친 척, 돌아버린 척 당신만 보고 갈수 있게.

 

그때였다. ‘끼익.’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동시에, 은회색 세단의 창문이 열렸다.

“혹시...... 다은씨?” 제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음색에 소스라치듯 고개를 들면, 어딘지 낯이

익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아...... 파티 장 이사님 친구 분?”

 

평소의 그녀라면, 업무적으로 마주쳤던 사람에게 무방비 상태인 모습을 노출할 리가 없지만,

지금은 그저 멍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생각과 달리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를

지켜보다 못한 준서가 무작정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우선 차에 타요. 타서 생각해요.”

 

 

 

눈이 마주친 잠시, 준서는 여자의 텅 비어버린 눈동자 속에서 그날의 지수를 만난다. 준우가

파혼을 선언했던 그날, 무작정 저를 찾아온 지수의 눈빛도 지금의 그녀와 꼭 같았다. 아프고

아프고 아프다고, 너무 아파서 아픈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그 모두를 잊어야만 살아질 만큼.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이 여자 곁을 맴돈 것은. 그날의 그녀를

놓쳐버렸던 것처럼, 이 여자마저도 잃게 될까봐. 파티 장에서 이 여자를 처음 마주한 날부터

다시 만나게 된 오늘까지, 본인도 납득할 수 없는 무수한 이유를 들어가며 여자를 찾았었다.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원래는 형과 정혼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날부터, 단 한 순간도

지수를 마음 편히 바라본 적 없던 준우가,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놓아버린

비겁한 녀석이,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사랑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그녀석이 ‘사랑’이라

장담한 여자가 실은 형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화가 치밀었다. 그럴 바엔 지수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리고 이 여자를 만날 자격도 없는 거라고 대놓고 따지기도 했다.

 

‘상관 말라.’던 준우를 향해 가차 없이 날아갔던 주먹, 이후로 여자를 수소문하고 쭉 그 곁을

맴돌았던 마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출국해버린 지수를 향한 그리움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안함이었다가, 준우의 곁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여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를 찾는 습관 또한, 사랑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기뻤다. 아파서라도, 잠시 뿐이라도, 제 옆에 머물러주는 그녀가 고맙고 고맙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여기만 아니면.”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 주겠다.’는 낯선 남자의 호의에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다은은 스스로의 대답이 제 것이 아닌 듯 낯설어 눈길을

차창으로 돌렸다. 무심히, 정말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회색빛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이곳에 함께 살았던 은우를 여전히 여기에 살고 있는 준우를 떠올렸다. 자꾸만 숨이 막혔다.

 

금방이라도, 은우이거나, 준우이거나, 혹은 자신이 그리워한 누군가가, 무수한 인파를 뚫고서

제게로 달려올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차라리 거짓이라

믿고 싶었을 그 모든 것들까지도, 그 사람 하나로 모두 지워지고, 잊혀 질 것 같다.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를 떠나간 당신, 또 날 찾아온 당신, 당신이 내게 준 맘은 진심이니?’

 

다은은 체기를 넘기듯 가슴을 치며 눈물을 삼켰다. 지금은 다만 여길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남자는 쭉 말이 없었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마실 것과 요기 거리를 사다줄 때를 제외하곤,

특별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카 오디오의 음악을 잔잔한 클래식으로 바꿔주거나, 무릎

담요를 건네는 것으로 그녀를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출할 뿐이었다. 마치 세상 끝에 선

그녀가 마지막 순간 마주하며 ‘고맙다.'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야하는 제 수호신인 것 같았다.

 

남자는 오래지 않아 낯익은 바닷가 앞에 차를 세웠다. 그저 눈만 뜨고 있을 뿐, 멍한 다은의

눈동자 속으로 낯익음의 정체가 그대로 파고들었다. “여긴 어제저녁 이사님과 함께 왔던......“

그녀의 얼굴에 잠시 눈길을 주던 준서가 도어의 잠금을 풀었다. “울고 싶을 거예요. 울어요.”

 

‘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느냐.’는 날선 물음을 앞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차문을 열고 바다를 향해 달리던 그녀의 걸음이 푹푹 꺼지는 모래 속에 꺾였을까. ‘엉엉......’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이 소리가 되었다. 성난 파도소리로도 가릴 수 없는 슬픔이,

‘꺽꺽’ 토해내지 못한 아픔이, 자꾸만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었다. ‘미안. 미안해. 은우야......’

 

‘네가 나 버리고 간줄 알고, 바보처럼 원망만 해서 미안해. 너 하늘에 산다는 것도 모르면서,

나 떠났다고 미워해서 미안해. 평생 너 사랑한다고 해놓고 다른 사람 쳐다봐서 정말 미안해.

그 사람한테 흔들려 버려서 나한테 거짓말한 그 사람을 미워할 수만은 없어서 진짜 미안해.‘

 

울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이 말랐다고 느껴질 즈음, 목소리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을

어느 순간, 성난 파도를 잠재우듯 자분한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가 제 어깨에 옷을 둘러준다.

남자의 카디건은 얇지만 온기가 돌았다. “오늘은 고맙습니다. 이 은혜, 언젠가 꼭 갚을게요.”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다은씨 덕분에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낸 기분이 드니까.

언젠가, 제가 좋아하던 여자가 다은씨처럼 울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는 이 카디건 하나 걸쳐

주는 일도 선뜻 해줄 수가 없었죠. 그런데, 여자가 떠나고 난 뒤에야 생각이 나더군요. 그때

옷이라도 걸쳐줄 걸 그랬구나. 그럼 덜 추웠을 텐데, 어쩜,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모두 다 이해할 것 같은 기분, 이미, 뼛속까지 이해해버린 느낌.

다은은 읊조리듯 말을 쏟는 준서를 바라보다, 무엇도 묻지 않은 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사랑한 사람도, 떠난 사람도, 보낸 사람도, 돌아올 수 없는 사람도, 모두 받는 것이 상처라면

비겁하게 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날을 붙들고 울며 후회만 남기기는 싫었다.

 

“에스코트 해주신 김에 집에 데려다주세요 완전 아픈 척 하려고 했는데 동태 될 것 같아요.”

 

‘후훗’ 준서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만들었다. “울면 배고픈데 괜찮아요?”

낯설지만 낯설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가 물어주는 안부, 나쁘지 않다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화차 통이라도 삶아 먹을 것 같지만 우선 집에 갈래요 집에 가서 마저 아프고 밥 먹죠 뭐.”

 

미미하게나마 웃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지수와 다른 모습을 한 여자인데, 꼭 지수를 보는 것 같아서, 이 여자가 흘리는 눈물이

그때 그날, 자신이 품어주지 못한 사랑의 대가인 것 같아, 준서는 자꾸 아픈 마음이 들었다.

 

‘지수야. 네가 보내달라고 매달려도, 더 이상 누구 때문에도 아프고 싶지 않다고 사정했어도,

널 보내지 말았어야 했을까. 준우를 잊지 못한 채, 내게 기대온 네가 때로 밉고 버거웠어도,

끝내 너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어야 했을까. 지금 이 여자가 다시 준우에게 가겠다고 하면,

나는 널 보낸 그때처럼, 이 여자를 보내줄 수 있을까. 지수야. 나 어떡하니. 자꾸 욕심이 나.‘

 

씩씩한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에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여자의 손을 먼저

잡아 이끈 것은 준서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한 듯 손을 움찔거리던 다은도 모래의

깊이에 푹푹 꺼지는 제 걸음을 어쩌지 못하고 준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는다. 말없이 걷는

걸음걸음 그와 보조를 맞추며, 준우에게는 찾을 수 없었던,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다은이다.

 

 

 

감정의 정체를 생각해보기에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마음을 수습하기에는 차체의 속력이

너무 빠른 것 같았다. 문득 찾아온 두통에 눈을 살짝 감았을까. 잠시라고 생각했지만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집 앞에 닿아있었다. '설마 나 잠든 거야?‘ 화들짝 놀란 그녀가 옆 자리에

눈길을 돌리면, 두꺼운 책을 손에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 속에 담긴다.

‘이 남자 몇 시간째 운전대만 잡고 있었지.’ 그녀는 그제야, 남자가 제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미안해서 차마 흔들어 깨우지 못하고, 그저 제 몸을 싸고 있던 모포를 남자에게 덮어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왜 나만큼이나 고단해 보일까요? 왜 내게 턱도 없는 호의를 베풀었나요?’

‘철컥.’ 그녀가 목에 잠긴 말들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도어의 잠금을 풀고, 차문을 열었을까.

그녀의 발이 아스팔트에 닿을 때, 반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붉은색 페라리의 문도 열린다.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나. 내 여자가 친구라고 부르기도 쪽팔린 새끼랑 같이 있다니.

그래. 이게 제대로 된 치정이지. 박 비서 브라보! 두 남자 사이에서 놀아본 소감이 어떤가?“

 

“이사님......”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는 다음 말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의식보다 앞선 걸음이 준우를 향하려는 찰나,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휘청’하는 몸뚱이를

누군가가 붙든 것도 같았다. 곧이어 들려오는 두 남자의 고성소리가 팽팽하게 몸을 감싼다.

 

 

 

 

 

 

이런 제 말이 독자님께 어떻게 들릴지 조심스럽지만, 가끔 제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어요.

 

며칠 전 뽑은 사랑니의 통증이나, 어깨에 결린 담, 고된 일들을 핑계 삼아 울고 싶어 질 때면

저는 바보처럼 여지없이 당황에 노출되니까요. 괜찮다고 말해야하는 이의 버거움이랄까요?

가끔은 저도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대부분 위로하고 있거든요.^^;;

 

누군가에게 건네는 ‘괜찮다. 괜찮아 질 거다’라는 문장은 어쩜 저의 자기 최면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이 아이들에게 ‘괜찮다. 지나갈 거다.’ 같은 번연한 말이 필요 없기를 바랍니다.

괜찮으면 괜찮은 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피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과 마주하도록.

 

 

                                                                                     -2012年 07月 07日 Am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