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Drama/글속愛빠지다

[사랑의 무게]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No.19

Betty1983 2012. 11. 18. 16:38

Photo By : Mr.Yang Thanks For Your Present. ^^

 

 

 

                                                                                                            그대를 위해서라면,

                                                                           길가에 밟히는 젖은 낙엽이 되어도 좋으리.

                                                                                                      그대를 비출 수 있다면,

                                                                                 거리에 붙박인 가로등이 된들 어떠리.

                                                                                                 그대 곁에 살 수만 있다면,

                                                                                           그 무엇으로 산들 좋지 않으리.

 

                                                                                                               -Betty : 無題-

 

 

 

며칠이나 흘렀을까. 낮이면 멍하니 깨어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 일로, 밤이면 내내 뒤척이다,

겨우 선잠에 드는 것으로 그녀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도 겨우 잠이 들고나면,

그날의 일들이 생생한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통에, 깊은 잠을 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나쁜 놈, 나쁜 새끼, 내가 어떤 마음으로 갔는데, 그 마음이 어떤 건데, 난 네가 누구여도,

살인자 동생이었어도, 설령 내 원수였어도 상관없었어. 그냥, 너면 됐는데, 그거면 됐는데,

뭐가 어째? 벨도 없냐고?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듣는 게 목표였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무의식중에 준우가 했던 말들을 곱씹고 곱씹다 보면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음식은 들어가는

족족이 체하거나, 장염 걸린 아기마냥 지독한 설사로 인한 복통만 가져왔다. 중병 환자처럼

마냥 누워 있거나,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해가 뜨고, 또 해가 지는 것도 같았다. 그녀에게

세상은 이미 무중력 상태, 시간은 그날 이후와 이전으로 명확히 분리 되었다. 숨이 멎었다.

 

오늘도 동이 트는 것을 보고 나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던가. ‘쾅쾅쾅!’ 환청처럼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잠 사이로 파고들었다. ‘또 꿈인가. 꿈이겠지.’ 그녀는 몸을 모로 누이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썼다. '쾅쾅쾅! 쾅쾅쾅!‘ 두꺼운 이불로도 막을 수 없는 절박한 소음,

꿈인 줄 알았던 그 소리는 점점 사실이 되어 그녀의 의식을 현실로 끌어내고 있었다. ‘뭘까.’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현관 앞에 다가섰다. ‘쾅쾅쾅!!’ 그때까지도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좀처럼 멎을 줄 몰랐다. 아직은 어두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선뜻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덜컥 문을 열어줄 수도 없어서, 현관 앞에 선채, 머뭇거렸을까.

“문 열어! 문 열라고!!” 너무나 그리웠던 음성, 끝이라 생각하면서도 기다렸던 목소리, 준우,

그가 와 있는 듯했다. 아니, 그가 와 있었다. 문만 열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그가 서 있다.

 

처음에는 새벽빛을 밟고 서있는 것처럼 몸이 붕 뜬 듯 했고, 그 후에는, 현관에 깔린 타일의

차가운 감촉이 발끝으로 전해졌고, 끝으로, 눈가에 남은 잠이 모조리 사라졌다. 왜 왔느냐고,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느냐고, 개념을 술에 말아 처먹다 못해서 염치까지 안주로 씹었느냐고,

모진 말들을 떠올린 건 단 몇 초 사이,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떨리는 손이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훅 불어오는 겨울 초입의 냉기와, 그의 거친 숨이 얼굴에 닿았다.

남자의 입에서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입김, ‘이 사람 춥구나. 춥겠구나.’ 원망보다

앞서는 자신의 걱정이 행여 얼굴에 서릴까, 그녀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왔어요?”

 

여자의 뾰족한 말끝을 알아차린 남자가 순간 말을 잃었을까. 숨을 가다듬은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시선을 던진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내가 좀 미쳤었던 것 같다.”

왜 일까. ‘피식’ 남자의 첫 마디에 실소부터 새어 나왔다. 물론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라고,

이 남자의 진심이 그토록 잔인할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말로 들으니 쉬웠다.

 

이토록 쉬운 걸, 이렇게도 간단한 걸, 몇날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동안 고민하고 아파했다니,

이 남자의 말 한마디면 무마될 순간을, 저는 끙끙 앓으며 숨 쉬는 시체처럼 살지 않았던가.

사랑한다는 말도, 헤어지자는 말도, 또 돌아오는 것까지도 당신은 뭐가 이리 쉽고 가벼운가,

그의 까칠한 얼굴도, 초췌한 매무새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았던 화가 솟았다.

 

“당신은 참 간단해서 좋구나. 네 마음대로 사랑하고, 네 멋대로 헤어지고, 너 꼴리니까 왔니?

당신이 뭔데, 네 까짓 게 뭔데, 이 시간에 찾아와? 당신 내 남편이야? 당신이 뭔데 여길 와?

네가 사랑한대서 흔들려 줬고, 네가 싫다 그래서 꺼져 줬어. 그럼 된 거 아냐? 뭘 더 바래?“

 

“당신이 욕해도, 무슨 말을 해도, 할 말 없는데, 그때, 내가 당신 찾아갔을 때, 준서 자식이랑

둘이 있는 거 보고, 나도 돌았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도망가고 싶으면 가라고, 세상 끝까지

내가 따라갈 거니까, 당신 있는 곳 어디든 나도 갈 거니까, 당신이 날보고 웃을 수 있는 날,

그게 언제든 나한테 오기만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어. 그 말 하려고 미친놈처럼 찾아다녔어.

근데 당신이, 내가 환장해 있는 여자가, 딴 놈 품에 안겨 있잖아. 그래서 정신 줄 논거라고.“

 

평소의 어투와 달리, 띄엄띄엄 힘겹게 이어지는 단어들, 눈에 띌 만큼 쳐진 어깨와, 딱딱한

시멘트 바닥의 냉기를 묵묵히 견디고 있을 그의 시린 무릎까지, 마음으로 아프게 밟혀왔다.

하지만 한 번 깨진 신뢰를 무슨 수로 회복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마음을 적당히

주는 법을 알지 못해 모두 내어주었던 것처럼, 지난 일을 돌이키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줄까? 사랑한다는 말은 개 뻥이었고, 괜찮다는 말은 가식이었고,

달콤한 고백은 내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잖아. 진심이란 건 개나 줘버릴 너 같은 인간,

사랑한다는 고백이 세상에서 제일 쉽고, 이별은 더 쉬운 너라는 개새끼를 어떻게 믿어줄까.

 

그냥 평생 네 상처나 핥으면서 패배자로 살아. 더는 멀쩡한 사람 바보 천치로 만들지 말고.

내가 잠시나마, 너한테 내 전부를 걸었던 걸 생각하면,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발 연기 작작하고 이만 내 인생에서 꺼져. 너 따위 없이도 난 잘 살았고, 또 잘 살 거거든.“

 

‘울컥’ 말과 침묵 사이에서 잠시 만나졌던 시선이, 다시 어긋났을까. 여자는 활짝 열려있던

현관문을 반쯤 닫았다. 열려 있는 절반의 문과, 그 절반의 공간 사이로 어슴푸레 비쳐드는

남자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 저리게 실감하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열심히 살지 말 걸 그랬어요. 남들처럼 적당히 살고, 적당히 일하고,

그저 그렇게 사랑할 걸 그랬어요. 가볍게 사랑하고 바람처럼 잊을 걸 그랬어요. 남들처럼만,

딱 그만큼만, 마음에 둘 걸 그랬어요. 사랑은 쉽고, 이별은 별게 아니라면, 돌아오는 당신을,

한 번쯤은 모른 척, 웃으면서 맞아줄 수도 있을 텐데. 난 그럴 줄 모르네요. 정말 미안해요.‘

 

‘쾅!' 일초라도 망설이면 눈앞에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울까봐, 그를 안고 무조건 괜찮다고,

이렇게 왔으니까 괜찮다고 말해 버릴까봐, 제 옆에만 있어달라고 매달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이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될까봐, 문을 닫아버렸다.

닫히는 문틈 새로, 끝내 저의 눈을 마주보던 남자를 기억하면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참 이상했다. 그와의 이별을 온전히 인정한 뒤, 자신이 왜, 어째서 그에게 갈 수 없는 건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난 후, 그녀는 놀라운 속도로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새로 직장을 찾고,

그만 두었던 공부를 시작했으며, 도통 취미를 붙이지 못했던, 요리학원까지 다니고 있었다.

다만, 제 시간에 잠들 수 없고, 일찍 깰 없을 뿐, 불쑥불쑥 그가 떠오르는 것마저 무뎌졌다.

 

그런 탓일까. 오늘 뜻밖에 미르의 연락을 받고도 크게 동요치 않았던 건. 한 번쯤은 준우의

안부가 궁금할 법도 하련만, 굳이 물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다만 한 낮의

카페에 앉아 환한 햇살을 받고 있자니, 전에 없던 졸음이 쏟아질 뿐이었다. “좋아 보이네요.”

 

화이트슈트에 핑크색 코르사주를 단 미르가 대낮의 햇살보다 환한 얼굴로 웃으며 다가왔다.

‘그를 아는 사람, 하지만 이젠 그를 알뿐인 사람.’ 그녀가 졸음을 털어내며 고개를 숙였을까.

나른한 그녀의 얼굴에 스친 찰나의 떨림을 캐치한 미르가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준우가 단단히 사고 쳐서 지 밥상 받는 건 맞지만 스크래치 주범이 멀쩡하니 섭섭한데요?”

 

“이사님이 흐트러진다고 저까지 그래야 하나요. 어차피 각자 사는 인생, 서로 잘 살아야죠.”

 

처음에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믿었는데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심드렁한 그녀의 반응에,

미르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과로를 일삼는 준우의 얼굴과, 이제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은우 형의 얼굴이, 하나가 된 듯, 연이어 오버랩 됐다. 입매가 굳는다.

 

“헤어지면 남보다 못해질 수도 있는 게 연인이라지만, 정리가 그렇게 빠른가요? 편안해요?”

 

“말씀 중에 실레지만, 사장님께 개인적인 일에 대해 말씀드려야할 이유는 없는 걸로 압니다.

이사님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더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요. 안다고 해도, 두 사람의 문제죠.

이사님을 걱정하시는 사장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일로 호출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찼거나, 혹은 차였거나, 이미 끝난 사람 애기 듣는 거, 불편합니다. 먼저 실레 할게요.“

 

 

 

“준우랑 두 번째로 만났던 카페 기억해요? 학교 근처에 있는. 십년 전 바자회 때, 불이 났죠.

그때 은우 형이 당신을 구했다죠? 은우 형이 당신을 처음 본 곳도 거기라던데 맞나 몰라요.

내 예상이 맞는 거라면 그 화재가 은우 형과 당신을 엮어준 건데, 재미있단 생각이 드네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그녀의 걸음이 멎었다. 잔뜩 굳은 얼굴,

파르라니 경련이 일정도로 떨리는 입매, 재차 돌아오는 그녀의 몸짓에서 분노가 전해졌지만,

미르는 외려 웃고 있었다. ‘이게 웃어?’ 그녀는 머리끝까지 오른 화를 누르려 숨을 몰아쉰다.

 

“사장님! 아무리 이사님을 아끼신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시네요. 이 상황에 맞지도 않고요.

은우 애기 들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분께서 왜 이러시죠??

이미 죽은 사람, 모르고 보낸 것도 가슴 찢어지는데, 함부로 떠들지 마세요. 듣기 싫습니다.“

 

'피식’ 그녀의 거침없는 비난에 자연스레 실소가 비어졌다. 누가 함부로 떠들만한 사람인지,

지난 세월동안 누가 위악을 떨었고 누가 가슴앓이를 했는지, 대체 누가 당신을 사랑했는지,

이 여자에게 똑똑히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이 사실은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준우의 당부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싸늘한 얼굴 앞에 지운다.

 

“그때 당신을 구한 사람이, 은우 형을 닮은 다른 누구일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멈칫’ 남자의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정지 됐다. 그 다음을 묻기가 두려웠다.

 

 

 

 

 

 

진심이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돌아서버릴 때, 전부를 걸었던 순간들이 찰나에 스러져버릴 때,

그 마음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만일 떠났던 사람이 돌아온다면, 상처를 주었던 이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도.

 

하지만 뭐라고 진심을 전한들, 처음처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마음이 진실했던 만큼 그 사람에게 잔인해지기도 하겠죠. 사실, 전 지금까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인 것 같아요.

 

부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틀렸더라도 그 순간의 최선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2年 11月 18日 -Pm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