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Review/영혼의 발자취

[영혼의 발자취] 운명, 이 어리석은 나의 믿음.

Betty1983 2014. 6. 12. 16:18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저의

운명이 밉습니다.

 

-하상욱-

 

 

 

 

321

 

 

 

녹초가 되어 털레털레 돌아온 집 앞에서 배달 된 선풍기를 발견했다.

텅 빈 머리, 기계적인 몸놀림으로 박스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집 안으로 들여 놓았을 때

내가 처음 인지한 현실은  방안에 내버려두기에는 '박스가 꽤 크다.'는 사실이었다.

 

장을 보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기운까지 다 소진한 터라, '우선 그냥 두자.' 싶었는데.

씻고 나서  정신이 한결 맑아지자 지랄 맞은 성미를 어쩌지 못하고 그 박스가 계속 눈에 걸리는 거다.

우선 상자를 개봉해서 분리수거를 하고 조립은 차후에 하자는 생각으로 뚜껑을 열었는데,

스티로폼과 에어 캡에 둘둘 쌓인 채 모습을 드러낸 선풍기의 실체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본체 따로, 망 따로, 지지대 따로, 완전히 분해되어 널브러져 있는 선풍기의 잔해를 바라보자니,

어떻게든 조립을 해서 이 난장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것은 당연지사.

 

설명서를 펼쳐들고 읽기를 한참, 

분명 한국말인데도 당최 이해되지 않는 검은 글자들 앞에서 멍하기를 또 한참.

그렇게 한 시간 즈음 씨름하고 나자 ,

'이 선풍기를 조립해 주는 사람하고 살아버릴까.'싶은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따위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더 화가나버려서,

오기로, 똘기로 붙들고 늘어지기를 한참만에 선풍기를 완전히 조립할 수 있었는데.

 

잘 돌아가는 선풍기를 앞에 두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녹진한 오늘 같은 날,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면서까지 굳이 이것을 조립해야 했을까.'

길어야 하루일 텐데 한 번쯤 엉망인 채로, 난장판인 채로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던 걸까.

 

 

제 신수는 제가 만드는 것인데,

'나는 왜, 늘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못하는 걸까.'

 

 

이러다, 이렇게 날이 선 채 나를 찌르다가,

결국에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까지 이 날을 향하게 될까 두려워지는 거다.

 

내게 오기를 망설이는 당신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기꺼이 한걸음 물러나는 내가,

행여 당신이 다칠까봐 아닌 척, 모르는 척, 모두에게서 당신을 감추는 내가,

당신의 여린 마음에 작은 생채기라도 내게 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올 당신을 사랑하고자 한다.

나의 운명을 믿지만, 그 운명을 미워하는 내가 감히 당신을 마음에 두고자 한다.

 

내게 올 당신이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혹은 외계인이라도,

내가 신뢰하고 미워하는, 당신이 버거워할지도 모르는 그 운명까지 사랑하고자 하니,

꽃 같은 나의 당신, 그 어떤 모습으로라도 나를 찾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