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말을 걸다] 당신, 혹은 나를 위로하다.
시래기 作 : 고정애
눈보라치는 어느 한낮 투박한 질냄비에 풋고추랑 눈보라랑 고추장 된장이랑 얼키고 설키겠어. 보글보글 은근하게 끓다가 달다가 그대 마음 풀어주는 국으로 나야겠어.
정월 대보름 달 밝은 저녁나절 파 마늘 양념에 범벅으로 버물리어 달빛 두른 번철에 달달 볶이다가 그대 입맛 돋우는 나물이 되겠어.
그도 아니면 뼈로 남겠어 가시가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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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모를 것이다. 아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끝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그 무엇이라도 되기를 꿈꾸었는지.
하루일과를 마친 당신이 노곤한 걸음을 내딛을 때,
닳고 닳은 당신의 신발 밑창을 조금이라도 포근하게 감싸줄 한줌 모래이거나,
피곤이 내려앉은 당신의 얼굴을 스쳐가는 한점 바람이라도 좋았으리라.
당신의 설운 속을 달래주는 한잔 술로 태어나,
당신의 혈관 곳곳을 돌아디니며 홧홧한 마음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당신이 삼켜지지 않는 마음을 달래려 매캐한 담배연기를 벗삼을 때,
불안하게 떨릴 손끝에서 꺼질듯 꺼질듯 꺼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타들어갈 담배 한 개비,
혹은, 문득 깨어난 새벽녘 당신의 갈증을 달래줄 물 한 잔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당신이 아주 오래된 허기에 시달릴 때마다 식탁에 올라서,
헛헛한 속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된장찌게 한 그릇으로 난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
어느 날 화가 난 당신이 무심히 차고 지나쳐버린 돌맹이 하나여도 좋을 것이다.
언제나 거기에 있을 당신과,
영원히라도 여기에 머물 나는 영영 만나지지 않을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듯,
그 무엇이 된 채로 당신 곁에서 살아간다면 그 무슨 슬픔이 있을까.
그 무엇도 이루지 않음으로써
바라마지 않던 모두를 이룬 우리는 이처럼 평안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