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돈죵]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中)
이 사진은 GD의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내 앞에 놓여있던 몇 갈래의 길,
그 모든 길이 네게로 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어리석게도 모든 길을 지운 채 오직 너를 찾아 걸었다.
세월을 잊은 이 몸도 어느덧 쇠잔해지고,
부르튼 발이 아프다는 자각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너를 잃고, 나를 잃고, 모두를 잃었음을.
-Betty : 無題-
저잣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지용이 가장 먼저 한일은 목판을 들고 다니는 아이를 불러 세워서
형돈이 좋아하는 새하얀 엿을 몇 가락 사는 일이었다. 새하얗고 단단한 그것을 형돈의 손에
쥐어주자 종전까지 컴컴하기만 하던 낯빛이 대번에 환해졌다. ‘이럴 때는 정말 아이 같구나.’
제 정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지용이 그의 동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을까. 그 손길 한 번에
수염이 거뭇한 사내는 간데없고 금세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형돈이다. “되련님도 드세유.”
저처럼 새하얀 엿가락 하나를 수줍게 내미는 손길이 어여뻐 그저 바라보던 지용은 부드럽게
그 손길을 밀어내며 속삭이듯 말을 전한다. “형돈아, 기실 나는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니 내 대신 많이 먹으련. 나는 먹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나직한 지용의 음성을 따라
점점 형돈의 눈망울이 커다래진다. “시방 그게 무신 말씀이어라? 되련님 어릴 적에 천자문
달달 외운 게 이 엿 드시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라? 되련님 드릴 엿 만드느라고 온종일
아궁이가 식을 날이없응께 허리를 펼 수가 없다고 행랑어멈이 올매나 궁싯댔는지 아셔유?“
“엿 때문에 천자문을 열심히 외운 것은 맞지. 헌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 네가
좋아하니까 주고 싶었던 게지. 지금처럼 좋아하는 너를 보면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기뻤다.
네가 이앓이를 할까 염려되어 내가 먹은 척하고 조금씩 주긴 했지만 결국, 다 네 거였지.“
멍한 표정으로 지용을 쳐다보던 것도 잠시, 형돈은 이내 고개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제 손에
쥐어진 새하얀 엿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루에 백자씩,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운 뒤에야
상으로 주어지던 엿이었다. 밤새 호롱불을 밝힌 채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않던 제 주인에게
볼멘소리를 늘어놓은 것도 여러 번, 그때마다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하던 도련님에게 그렇게
엿이 좋으냐며 괜스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뒤늦게야 알게된 말없는 미소의 의미, 정인의
깊은 마음씀씀이가 기어이 형돈을 울리고 만다. “되련님, 이놈은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이리할까봐 말하지 않은 것이야. 마음 같아서는 겸상이라도 하면서 고깃국도 먹이고,
네가 좋아하는 지짐이도 챙겨주고 싶었지만 그리 했다가는 네가 경을 칠 테니 주전부리라도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차치하고라도, 너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형제나 다름이 없지 않았느냐. 조선의 기반이 무엇이고, 반상의 구분이 어떻다는 것을 떠나
너는 그저 나와 함께한 사람이야. 그러니 무엇인들 못해줄꼬. 네가 웃었으니 다 된 게야.“
지용은 새하얀 도포의 소매 자락을 들어 형돈의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누른다. 얼룩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형돈의 기함어린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눈물자국을 모두 지운 후에야,
만족스러운 듯 소매를 거둬들이는 지용이다. “소인 놈이 이 죄를 다 어찌해야 할지.......”
미간을 구긴 채 짐짓 엄중한 표정을 지은 지용이 푹 수그린 형돈의 얼굴로 두 팔을 뻗었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이니 네가 죄를 구할 일이 아니야. 그저 한번 웃어주면 안 되겠니?”
“되련님......” 송아지처럼 까만 눈동자가 제게로 향할 때, 그 순연한 눈동자에 일렁이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때, 울면서도 웃어보겠노라 안간힘을 써가며 입 꼬리를 올릴 때,
그런 정인의 모습을 목도해야만하는 슬픔을 무엇에 비할까. 지용은 그곳이 어디인지도 잊고
형돈의 어깨를 제 품속에 그러안았다. “애쓰지 마라. 제발 나 때문에 그리 애쓰지 마라.”
Title : 유서 Song By : 에피톤 프로젝트
나약하고 가난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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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소슬한 바람결에 제 품에 담긴 형돈의 체온이 식어가는 것을 느낀 지용이
근처 주막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지용의 손이 끄는 대로 주막의 평상에 앉기는 했지만,
주모가 건네는 국밥그릇을 받아든 형돈의 얼굴에는 가없는 염려가 서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용은 형돈이 보란 듯이 선지와 우거지가 섞인 국밥그릇에 수저를 담가 제 입으로 옮긴다.
“되련님. 비위도 약하신 분이 워찌이러신다요. 이러다 토악질이라도 하시믄 어쩌실라구유.
여기 상도 지저분하고 수저도 드러버서 까딱하믄 앓아누우신당께요. 사람 먹을게 아니어라.
출출하시믄 여기서 이라지 말고 퍼뜩 집에 가유. 이놈이 싸게 싸게 상 봐서 올릴 것잉께.“
“네가 먹는 것인데 어찌 사람 먹을 게 못 된다는 것이냐.” 살얼음 같은 지용의 음성이 제
귓가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형돈은 ‘아차!!’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 할 수 없어
우물거리며 마지못한 대답을 꺼내놓는다. “그, 그거야 소인 놈은 본디 천한놈잉께......”
“내가 그리 일렀거늘 이날까지 그 말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북풍한설 칼날 같은
지용의 음성이 형돈을 안절부절 하게 했다. “이놈은 그런 뜻이 아니고......” 형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용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 걸음으로 주막을 나섰다.
“아이고! 되련님!!” 다급해진 형돈이 손에 들린 국밥 그릇을 내려놓고 숨넘어가게 불러도
성난 그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이놈의 주둥이가 참말로 주책이어라. 지송하구만유,”
종전과는 달리 형돈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던 지용의 걸음이 멎은 곳은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골목이었다. 갑자기 멈춘 지용의 걸음에 지레 놀란 형돈이 어깨를 움츠린 채로,
눈먼 봉사가 더듬거리며 걸음을 내딛듯 지용에게 향했다. 멈칫대는 형돈의 몸짓에 묻어나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지용의 가슴을 저민다. ‘나와 함께하는 동안만이라도 온전한 사람으로,
귀천 없는 귀한 나의 정인으로, 너와 나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품게 되기를, 전심을 다해
바라고 또 바라였건만, 내가 부족하여 너를 온전히 품어주지 못했구나. 미안하구나......‘
지용은 태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을 두 주먹에 눌러 쥐고, 방금 주막을 나섰을 때처럼 형돈을
향하여 큰 걸음을 내딛는다. 이윽고 형돈의 동그마한 어깨가 제 손에 들어왔을까. 처음에는
그저,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붙들고 있던 지용의 손이 이내 형돈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찰떡처럼 새하얀 피부, 동글동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붉디붉은 입술, 나를 바라볼 때면
부드럽게 쳐지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눈 꼬리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없는데,
너는 어이해 매번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게야. 마음도, 생김도 곱기만 한 네가 어째서......‘
생각의 끝머리,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있는 정인의 입술에 제 숨을 쏟는다.
“읍! 되, 되련님!!” 지레 놀란 형돈이 버둥거릴 조짐을 보이자 그의 뒷목을 틀어쥔 상태로
가차 없이 입술을 물었다. “아얏!” 단말마의 비명처럼 짧은 탄식이 쏟아짐과 동시에 열린
입안으로 지용의 혀가 거침없이 유영해 들어갔다. 도망가려는 혀를 휘감아 마음껏 유린하며
곧 집어 삼킬 듯 치열이란 치열은 죄다 쓸고 다니는 갈급하고 뜨거운 정인의 몸짓, 한 올의
숨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얽매고, 옥죄고, 오직 제 숨으로 상대의 숨을 느끼는 행위를 나누며,
형돈의 복잡한 머릿속은 텅비어갔다. 오직, 자신을 붙들고 있는 지용의 고통만이 느껴졌다.
“되련님 지가 잘못했어라. 그니께 제발 지 때문에 아파하지 마셔유......” 자신과 이마를
이마를 맞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지용이 안쓰러워 연신 도닥이고 또 도닥이는 형돈이다.
그 따스한 손놀림에 울컥하며 치받치는 뜨거움이 끝내 지용을 울게 한다. “형돈아......”
“헛소리도 풍년이라고 참말 이 주등이가 방정이어라. 그러니 울지 마소. 되련님 지발유.”
“형돈아. 신분이 천하다하여 그 마음까지 천한 것은 아니다. 고매한 신분을 지녔다고 하여
그 마음까지 고귀한 것도 아니야. 매일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지닌 채,
세상과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귀천이 갈리는 게지. 물론, 대부분 비웃을 게야.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도, 내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리는 것이 많으니 말이다."
"......"
하지만 형돈아. 세상이 정해놓은 법도가 그렇다하여 사람이 사람을 멸시할 수는 없는 게다.
설령, 내가 너를 은애하고, 네가 나를 연모한다는 것이 세상의 통념에 어긋나도, 그로 인해
돌팔매질을 받게 되더라도 그것은 네 탓이 아니야. 물론 내 탓도 아니고. 그러니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죄스러워하지도 마라. 네 태생이, 너의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택한
사랑도 다르지 않아. 나는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할 것이니 네게 미안해하지 않는다.“
"......"
벌겋게 충혈 된 눈, 핏기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서도 자신의 양팔을 생명줄처럼 꼭 붙든 채,
단호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진심을 전하는 사람. ‘자신보다 나를 귀하게 여겼던 사람.’
이런 사람이 선택한 최선인데 어찌 따르지 않으랴. 끝내 이별이라도 웃으며 돌아설 것이다.
“되련님이 이놈 아껴주셨다는 거 알아유. 그 비단결 같은 마음, 한겨울에 쬐는 화롯불보다
따숩은 그 눈길을 어찌있겠어라. 천한 노비에, 종놈이라고 사람취급도 아니해주는 시상에서
오로지 되련님, 되련님 한분만은, 지를 사람으로, 형제로, 동무로, 정인으로 봐주셨잖아유,
의지할 곳 없는 세상이 두렵고, 잘못하면 호되게 꾸짖으시는 대감마님이 무섭고, 종살이는
팍팍했어도 되련님이 계셔서 견딜 수 있었어라. 감히 행복했구만유. 그니께 행여나 자책은
절대로 하지마셔유. 되련님이 이 약속 지켜주시면, 지도 약속할 거구만유. 지맴 아시쥬?“
“내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격랑처럼 휘몰아치는 슬픔을 억누르느라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어렵사리 대답을 내어놓는 지용의 눈가가 젖어든다. 형돈이 토실한 손가락을 들어
조심스레 지용의 눈가에 갖다 댄다. “지를 위해서 울어주시는 되련님 맘 평생 담고살게유.
그랑께 앞으로 더는 지 때문에 울지 마소. 되련님 눈물은 여기, 이놈 가심에 묻고 갈것잉께
웃으면서 사시란 말이요. 이심전심이라고 되련님이 웃으셔야 이놈도 웃고 살지 않겠어라?“
“나를 웃게 하는 이는 세상에 너뿐이구나.” 여전히 촉촉한 두 눈이나마 반달로 접은 지용이
도포의 소매 자락을 하늘거리며 형돈의 몸을 제게로 끌어당긴다. 언제나 따뜻한 정인의 품,
주인어른을 닮아 만사 냉정하고 빈 틈 없는 원칙주의자인 지용이 세상의 금기까지 파기하며
마음전부를 내주었음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더는 웃지도, 마음껏 행복하지도 못할 사람임을 알기에 형돈은 이품이 따뜻하고 또 슬펐다.
“되련님, 지는 말이예유. 죽일 놈 소리를 들어도, 돌팔매질을 당해도, 되련님에 대한 맴은
접을 수가 없어라. 그래서 평생 붙들고 살것잉께 나라님도 되련님은 지한테서 못 뺏어가유.
그려서 지는 되련님을 못 봐도 웃으면서 살 수 있구만유. 그러니께 이 놈 걱정은 하지마소.
참말 미안해하시지도 말구유. 일전에 되련님이 그러셨쥬? 사람을 마음에 담는 일이 죄가 될
까닭은 없는 거라고. 살아있는 것에 자연이 길을 내주듯 마음 가는 곳이 또한 길이 된다고.
지 마음 길은 되련님잉께, 되련님은 이 가심속에 평생 사실 분잉께 이놈 그저 행복하여라."
"형돈아......." 제 손이 닿으면 마냥 부끄러워하던 그전과는 달리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며
속사포 같은 진심을 풀어놓는 모습이 마냥 곱고 뭉클해서, 어이해 이런 마음을 풀어놓는지,
제 정인이 진정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지용은 자꾸만 가슴한편이 아릿하다.
처음 형돈을 향한 마음을 인지한 그날이후 한참을 불면에 시달리다, 혼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준비에 매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산속 암자로 도망치듯 떠났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그 말을 지푸라기 삼아 버티며 밤새워 서책을 읽다 지쳐 쓰러지기를
여러 번, 제 고집을 이기지 못한 몸뚱이가 앓아누웠던 그때, 난생처음 소리 내어 울었던가.
큰스님이 연통을 한지 반나절,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한 등짐을진 채 땀을 쏟으며 산사에
들어서는 형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다리쉼 한번 없이 ‘기력을 보할 상을 올리겠다.’며
분주하게 산사의 부엌을 오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옥죄던 것의 실체는,
세상의 법도도, 남색(男色)이라 명명하며 천시하고 금기하는 흔한 통념도 아님을 깨달았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죄, 무엇을 이루고자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고 또 달아난 죄, 이처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부터 눈 돌린 죄
제 마음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고 자만한 죄, ‘너 없이도 괜찮을 거라’ 제 마음을 기만한 죄.
그때서야, 지금의 형돈이 그러한 것처럼 제 정인을 가슴에 품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은애하고, 연모하고 또 흠모하니 그저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형돈의
주억거림 몇 번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하던 자신의 마음을 어찌, 몇 마디말로 설명할까.
‘차라리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너와 함께 세상 끝까지 달아날 수 있다면 우리 행복할까.’
지용은 무시로 이성을 흔드는 마음의 소리가 버거워 큰 숨을 쉬며 살포시 형돈을 밀어낸다.
“네가 산사에 다녀갔던 그날 말이다. 큰스님께서 내게 이르시더구나. 너와 나는 운명이되,
인연은 아니라고. 피할 수 있는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피해가라고. 만일 그럴 수가 없겠거든,
보내야 할 때를 알고 더는 욕심내면 안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네게 화가 미칠 거라 하셨지.“
“......”
“나는 그분의 서늘한 눈매와, 내 오장육부까지 꿰뚫는 것만 같은 눈빛이 불편했다. 아니,
근거 없는 말에 경거망동하여 기껏 다잡은 내 마음 흩트리고 싶지 않았어. 광증 난 노승이
괜스레 허언을 늘어놓은 거라고 믿고 싶었지. 하지만 잊을 수는 없더구나. 내내 불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고뿔에 떨어지지 않는 열까지 겹친 네가 사경을 헤맸고 나는 사색이
된 채로 행랑채를 서성이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 몰골을 아버님께 들키고 말았어.
내 얼굴을 흘깃 바라보고 지나쳐가셨을 뿐이지만, 그분이 눈치를 챌 만큼 나는 무너졌었다.
그리고 순간 깨달았지. 내 넘치는 마음이 네게 위해를 가하기전에 너를 보내야한다는 걸.“
“......”
“그 후로 출사를 서두르라는 이야기와 함께 혼사를 진행하시면서 당신의 심복을 통하여 내
일 거수 일 투족을 보고 받으셨을 게다. 그분 자존심에 당신의 하나뿐인 장자에게 남색이냐
다그칠 수는 없으셨을 테고, 아무리 확신이 섰다해도 명확한 증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너를
내치거나 벌할 수는 없으니 지켜보신 거겠지. 아마 오늘의 나들이도 이미 알고 게실 것이다."
“되련님!! 그라믄 참말로 큰일 나는 거 아니어라? 지야 우찌되든 상관없지만 되련님은......”
‘이 바보 같은 녀석, 행여 네가 잘못 되면 내가 온전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지용은 애써 속엣 말을 삼키며 놀란 눈을 하고 있는 형돈을 향해 그저 한 번 웃어 보인다.
“설마하니 아버님께서 혼사 날까지 받아놓은 새신랑을 죽이기야 하실까. 너도 마찬가지다.
십 몇 년 종살이하던 가솔 하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살집까지 장만하여 내보낸다고 장안에
칭송이 자자한데 별수 있으시려고. 무탈할 것이니 염려 말거라. 오늘은 우리만 생각하자.“
마지막인 것을 알아도 묻지 못할 때, 마지막임을 알고도 끝내 모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박꽃처럼 환히 웃는 정인이 아파서 형돈은 그저 따라 웃을 뿐
더는 무엇도 묻지 않는다. 다만 제 정인이 내민 손을 잡고 걸으며 시간이 멈추기를 바랄뿐.
첫 편을 올리고 꽤 오랫동안 손 놓고 있던 덕분에 감정 선이 잡히지 않아 한참 멍했습니다.
살짝 온 감기, 몇 군데 헌 입안, 근육통까지 깔끔하게 무시했더니 기어이 속이 뒤집히다가,
잠까지 쏟아지는 통에 한줄 쓰고 자고, 몇 줄 쓰고 또 자고, 겨우 깨어나면 한참을 멍하고.
(뭐 그리 대단한 일한다고 이리 요란스럽나 싶다가도, ‘그래, 이게 나지.’ 그저 웃었네요.)
내가 빨랐거나, 당신이 느렸거나, 내가 틀렸거나, 당신이 옳았거나 이제는 무의미한이야기.
다만 오늘의 내가 바라는 것은 일장춘몽 같은 인생사일지라도 조금은 평온한 꿈을 꾸는 것.
오늘 내 곁에 사는 당신,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오해도, 얄궂은 엇갈림도 존재하지 않기를.
-2015年 02月 10日 Am0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