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Drama/단편愛빠지다

[형용돈죵]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下)

Betty1983 2015. 3. 19. 02:47

 

 

 

                                                                                                 햇살이 밝아서 내게 오고,

                                                                                   별빛이 환해서 내게로 오는 그대여,

                                                                                                        우리 언제 이별했나.

 

                                                                                                    비가 내려서 내게 오고,

                                                                                   바람이 불어서 내게로 오는 그대여,

                                                                                                        우리 언제 작별했나.

 

                                                                                  꽃이 피면 그대 다시 내게 올 것인즉,

                                                                                   꽃이 져도 그대 다시 내게로 오리라.

 

                                                                                          -Betty : 無題-

 

 

 

평소와 달리, 지용의 걸음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성마르고 강팔랐다. 무언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뒤쫓는 사람처럼, 혹은, 이미 놓쳐버린 무언가를 붙들어 보려는 둣

절박하기까지 해서, 형돈은 행여 제 가쁜 숨이 그 길에 방해가 될까 잰걸음만 놓을 뿐이다.

 

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서 꽹과리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자못 심각하던 지용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길놀이 시작이야.”

길놀이라는 지용의 말에, 봄날 칼바람에 제 몸을 떠는 꽃 이파리처럼 소스라치는 형돈이다.

 

되련님! 시방, 남사당패 놀이판에 오신 거여라? 싸게 돌아가유, 대감마님 아시믄......”

 

그저 놀이판일 뿐이다. 저기 보아. 나폴 거리며 팔을 폈다 구부리는 모양이 흡사 한 마리

나비 같지 않으냐. 저리 꾸며놓으니 어우동도 울고 갈 미인인데 같은 남자라니 믿기지 않아.

거참, 신통하기도하다. 제 어깨위에 다른 무동을 또 태웠구나. 글쎄 저기 보래도 그런다.“

 

매사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형돈의 모습은 간데없이 지용의 팔을 그러쥐는 손길이 그악하다.

되련님!! 당장 돌아가장께요!” 잔뜩 부아가 난 얼굴,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형돈의 불안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용은 제 팔목을 우악스럽게 쥐고 있는 형돈의 손위에 제

손을 포개 얹으며 가만가만 다독인다. “또 다시 멍석말이를 당할까 두려운 것이냐. 이제는

내가 그리하게 두지도, 두 번 다시 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아.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거라.“

 

그것이 아니어라. 대감마님께서 되련님께 불호령을 내리실까 내사 속이 타는 것 아니요!!

그날 대감마님 매질에 되련님 다리가 부러지는 건 아닌가하고 얼매나 속을 끓였는지아셔유?

이놈이 멍석에 말려 뒤지면 뒤졌지, 그 꼴 두 번은 못본당께요. 암만! 당장 돌아가유!!!“

 

금방이라도 넘칠 듯 눈물이 그렁한 눈동자, 세 된 소리 너머로 언뜻 비춰지는 두려운 떨림,

생명줄인양 제 팔을 붙들고 있는 절박한 완력까지,‘너와 나, 우리 모두 잊은 척 살았지만,

그날의 상처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남아서 여전히도 너를,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하는구나.‘

지용은 형돈에게 잡힌 팔을 빼지 않은 채 남은 팔을 뻗어 동그마한 등을 제 가슴에 품는다.

 

한손은 네게 잡혀 있고, 한 팔로는 너를 안으니 이품에 세상이 넘치는구나. 이대로 결박

당하여 일평생 한 치도 나아 갈수 없다 해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허니, 그날 일은 잊어라.

네가 멍석말이를 당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그리 나를 달래 주지 않았더냐. 그러면 내가

아버님께 회초리를 받은 것 역시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받은 게지.

외려 미안하구나. 내가 그날 괜한 고집을 부려 죄 없는 너까지 고초를 겪게 했으니......“

 

아니어라. 아니어라. 참말로, 이놈은 암시렁도 않아라.” 댕기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세찬

도라질, 여전히 떨리는 음성 속에 묻어나는 물기가 지용의 명치에 아프게 파고든다. 지용은

이미 제품에 담은 형돈의 온기를 놓칠 새라,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도드라질 만큼 힘을 준다.

나는 그때처럼 어리지만도 않은데, 그때 보다 더 단단해졌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너를

울리는구나. 다만 내 곁에 살았다는 이유, 나를 연모한 까닭으로 이다지도 상처받는구나.‘

 

제 눈물이 귀한 정인을 다시 아프게 할까 포옹을 풀지 못한 채로 가만히 두 눈을 감을 제,

한낮의 바람은 제법 사분해졌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사늘한 기운이 지용을 그날로 데려간다.

결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기억 속 그 자리, 무력한 제가 있고 정인이 있고, 아비가 있다.

 

 

 

 

 1. 지승 : 밤지(종이를 비벼 꼬아서 만든 끈.)   2. 버나 : 쳇바퀴, 대접, 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

 3.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하는 놀이  4. 어름 : 줄타기   5. 덜미 : 전통인형극(꼭두각시 놀음.)

 

 모든 놀이에는 재담과 창이 곁들지며 지배층의 횡포 고발, 외래문화 배척, 서민들의 염원이 주된 내용을 이룸.

  

 

 

 

차갑게 가라앉은 아버지의 분노는 사위를 얼릴 듯했지만, 사람을 시켜 매질을 할뿐 표정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지승으로 만든 채찍이라고는 하나 마소를 모는데 쓰이는 것이니,

장시간 매질을 당한다면 아무리 강골이라도 몸이 견뎌내지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도 멍석에

말린 채 모진 매질을 당하면서도 앓는 소리 한번 나지 않는 것이 지용을 더 불안하게 했다.

 

혼절이라도 한 건가, 잘못된 건 아닐까, 혹시 숨이 끊어진 건 아닐까. 그럼 나는......’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그 상황을 묵과할 수가 없어 급한 마음에 머리부터 조아린다.

 

아버님!! 저 아이는 마지막까지 소자를 말렸습니다. 제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은 게지요.

허니, 이는 저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 불민하고 부덕한 소자의 불찰이니 부디,

소자를 꾸짖어주십시오 잘못이 없는 이에게 죄를 묻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 사료되옵니다.“

 

자신에게 곁눈도 주지 않던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대는가 싶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돌아본다.

 

지금 네 입으로 저 아이의 실책을 고하지 않았느냐. 끝내 네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해도,

저 아이의 소임은 주인인 너를 바로 모시는 것이니 작금의 이런 사태 또한 저 아이 탓이지.

네가 가고자한다고 불구덩이로 모시는 수하라면 그자가 어찌 진정 주인을 위한다 하겠느냐.

 

여염집 사내아이라도 낯부끄러울 일인데, 하물며 한나라 좌상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제 발로

남사당패 놀이판에 찾아가 허허실실 거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일이냐!! 우리가 양민들보다

편안한 삶을 누리는 까닭은 학문에 정진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쳐 고단한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기 함이라 내 그리 일렀거늘!!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여인을 탐해도 경을 칠 노릇인데 남색패거리라니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니 소자의 실덕이 아닙니까. 제가 벌을 받을 것이니 부디 매질을 멈추어 주십시오.”

 

좋다. 허면, 네 실덕한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고해 보거라. 바로 알고 있다면 멈춰주마.”

 

그것은 본분을 잊고 놀이판에 걸음 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고 체통을 잃은 것이옵니다.”

 

틀렸다.....!”

 

하등 쓰잘머리 없는 호기심으로 귀한시간을 허비하고 잠시나마 중심을 잃은 까닭......”

 

틀렸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무리와 어울려 아버님의 체면과 가문의 명예를 실추했기 ......”

 

틀렸다...!!!”

 

“......”

 

네 잘못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용서를 구하겠다는 것이냐! 이런 한심한 놈!

그것이 호기심이든, 욕망이든, 설령 네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바라도 정도가 넘치는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살펴야하는 게 있다. 이 일을 행함으로써 네가 얻게 될 것과 잃게 될 것.

 

저 아이가 너를 말릴 때, 네 뜻대로 행동했다가 내가 알게 되면 경을 칠거라 언질 했을 터,

아니, 저 아이가 말하지 않았어도 너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헌데도 네 말대로

쓰잘머리 없는 호기심 하나 다스리지 못해 귀한시간 허비하고, 중심을 잃은 것이 아니냐.“

 

“......”

 

영특하고 재빠른데다, 너를 제 몸보다 귀히 여기고 살뜰히 보필하는 저 녀석이 기특하여,

너와 막역하게 지내는 것도 기꺼이 눈감아 주고, 마땅한 대우도 해준 것인데 후회막급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천한 것과 어울려 천한 것만 보고 배운 것이라면 네게도 실망이야.“

 

천하지 않사옵니다......”

 

뭐라...???”

 

천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 건방진 놈! 아직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주제에 말대꾸를 늘어놓는 것이더냐!!

그래, 맹랑하게 이 아비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 한다는 소리가 저 아이는 천하지 않다니!!

언제 이 아비가 우리 집 가솔들이 천하다 멸시한 일이 있더냐. 저 아이를 천하게 만든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너다. 본디, 위로 모시는 사람이 실책하면 아랫사람부터 책임을 묻는 법,

저 아이는 본분을 다하지 못했으니 지금은 존중받을 위치가 아니지. 네가 그리 만들었다.“

 

조목조목 반박할 여지가 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절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용은 어리석은

자신을 향한 화(), 형돈을 위해 무엇도 해볼 수 없는 무력감에 짓눌려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노기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듯 날카롭기만 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약간 누그러진다.

 

저 아이가 매질당하는 것이 네 무릎을 내놓아야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면, 너는 마땅히

네 미욱한 욕망을 다스려야 했다. 지금은 저 아이 하나지만, 훗날 네가 출사했을 때 이처럼

경솔한 행동을 범한다면, 네 수하는 물론이고, 너의 지기, 혈연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어

너 하나 죽고 끝난다면 네가 안고가면 그뿐이라지만, 네 가솔들은 무슨 죄가 있냐는 말이다.

 

이것이 이 아비가 저 아이를 벌하는 까닭이다 잘못을 알았다면 이 광경을 똑똑히 기억해라.

네가 사리분별을 잃고 그른 판단을 내렸을 때, 네가 귀히 여기는 사람이 어찌 되었는가를.

오늘 너는, 너의 부덕으로 네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다. 지금 그 눈물을 절대 잊지 말거라.

알아들었으면, 회초리 꺾어들고 방에서 기다려라. 네 불찰에 마땅한 책임을 지울 것이니.“

 

본디부터, 장자는 집안의 기둥, 하늘이 내리는 자리라며 지용을 엄히 다스린 아버지였지만,

그날은 몇 개인인지도 모를 회초리가 꺾여나가는데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지용은 입술을

그러 물고 아픔을 참았지만,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형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아픔만은 견딜 수 없었다. 그날이었다. ‘내 사람만은 어떻게든 지켜 내리라다짐했던 건.

 

 

 

 

   Title : 약속     Song By : 백지영 (원곡가수 : 김범수)

 

   언제나 사랑은 선택이었지
   또 다른 이유로 널 보내고 난 후
   내 눈에 흐르던 눈물의 의미를
   고개 저으며 빗물이라고 나를 위로했지

   그토록 사랑했던 너를 보낸건
   약속을 할수 없는 너의 현실 때문인걸
   나에게 사랑은 너 하나 뿐인데
   너는 상처로 나는 눈물로 생을 살아갈테니

   돌아온다는 너의 약속 그것만으로 살 수 있어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랑 그 이름만으로
   아주 늦어도 상관없어 너의 자리를 비워둘게
   그때 돌아와 나를 안아줘

   가끔은 외로움을 견딜수 없어
   늦은밤 술에 취해 널 찾아 헤메이다
   아직도 뜨거운 내 깊은 사랑을 부는 바람에
   내리는 비에 힘껏 띄워 보내

   돌아온다는 너의 약속 그것만으로 살수있어
   가슴깊이 묻어 둔 사랑 그 이름만으로
   아주 늦어도 상관없어 너의 자리를 비워둘게
   그때 돌아와 나를 안아줘

   그때까지 준비할게 널 위한 모든걸
   니가 다시 내게 돌아와 편히 쉴수있게
   편히 쉴 수 있도록

   돌아온다는 너의 약속 그것만으로 살수있어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랑 그 이름만으로 사랑해
   아주 늦어도 상관없어 너의 자리를 비워둘게
   그때 돌아와 나를 안아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여전히 소슬한 바람, 오랜 날들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기억, 눈앞에 놓인 이별이라는

현실에 감은 두 눈 영영 뜨고 싶지 않아도, 제 품에 담긴 정인의 온기가 자신을 채근한다

그래도 살아야한다고, 그럼에도 살아야한다고, 그래서 살아야한다고어렵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의 눈 속에는 동그란 형돈의 얼굴만 가득할 뿐이다. 그제 서야 조금 웃었을까.

 

되련님이 웃으시니께 이제 서야 이놈이 살 것 같아라. 지가 졌구만유. 뒷일이고 앞일이고

오늘은 되련님도 모르고, 지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는 걸로 하고 놀이판이나 구경하서유.

오매 입씨름하는 사이에 볼만한 건 다 종치게 생겼네. 싸게 싸게 끼어들어야 되겠구만유.“

 

말을 마치기 바쁘게 지용의 팔목을 붙든 형돈이 제법 큰 덩치를 무기삼아 빼곡하게 들어선

무리를 뚫고 맨 앞자리를 꿰찬다. “형돈아,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지용이 염려서린 통박을 주거나말거나 정중앙에 자리 잡은 형돈은 아이마냥 방싯댈 뿐이다.

 

되련님이 그날 올매나 씅내고 떼썼는지 아소? 맨 앞자리까지 맡았는데 그냥 집에 간다고,

그저 앵돌아져서는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불던지, 이놈 오금이 다 저렸지라. 그렇게 눈치 본

보람도 없이 대감마님께 혼쭐이 나는데 또 맴은 왜 그리 아프던지. 어차피 들키고 말거 우리

되련님 원이나 풀어드릴 걸 싶어지는 게, 가심 한편이 짠한 것이 지금까정 내내 걸렸어라.“

 

기분 좋은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고 아픈 속내를 드러내는

담담한 형돈의 모습에 가슴 찌르르한 통증을 느낀 지용은 뜨끈해진 눈가에 애써 힘을 준다.

형돈아, 어쩌면 우리네 삶은 잊어도 좋을 것, 그러나 잊혀 지지 않는 것들을 품고 사느라

이리 고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 까닭이 너여서 후회는 없으니 이 또한 고맙다.‘

형돈을 따라 입가에 말간 미소를 피운 지용이 뒷짐 진 손을 풀어 정인의 손에 깍지를 낀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길, 예상치 못한 온기에 놀란 것도 잠시, 이내 방긋 웃어 보인 형돈은

눈앞에 펼쳐진 놀이판에 정신을 빼앗긴다. 현란한 손동작으로 버나를 돌리거나, 흙바닥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살판을 부리거나, 허공에 매달린 외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로,

한 마리 새처럼 뛰어오르며 어름을 펼치거나 색색의 탈 뒤로 얼굴을 감추고 세상의 부조리를

속 시원히 꼬집는 그들은 세상이 천하다 멸시하는 천민도, 더럽다고 손가락질 받는 남색도,

그 무엇도 아닌, 세상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롭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너와 나, 나와 너, 우리가 진정 저들처럼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지용이 저도 몰래

홧홧해진 눈가를 애써 달래며 제 곁의 정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둘의 시선이 얽힌다.

형언할 수없는 감정의 파도, 그것은 가슴 치받치는 뜨거움이요, 이루어질 수없는 것에 대한

간절한 열망일지나, 그런 까닭으로 소리 내면 안 되는, 평생을 안고 갈 연모의 정일 것이다

 

“......”

 

“......”

 

아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때, 애써 다가가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보일 때, 그것이 여전히도 아픈 상처로 자신과 꼭 닮은 그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로 국한된다. 그를 안거나, 혹은, 그로부터 사력을 다해 달아나거나.

 

무작정 떼를 쓰며 울던 내가 너를 보고서는 거짓말처럼 웃었다했지. 그래,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너로 시작되고, 너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자.

내가 너를 가슴으로 안았고, 네가 나를 마음으로 품었으니 그 다음생인들 만나지 못할까.‘

지용은 어느새 습윤해진 형돈의 눈자위를 제 손길로 부드럽게 닦아내며 어렵사리 입을 뗀다

 

형돈아, 나는 말이다. 오래전 그날, 이곳에서 저들을 처음 본 순간, 그때부터 꿈을 꿨다.

나를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는 어른들, 곧 과년한 나이가 되는 누이와, 아직은 좀 더 부모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막내, 그리고 점차 노쇠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대하고있자면 은연중에

가중되는 장자라는 책임감, 이 모두를 벗어버린 채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연모하는 너의 손을 잡고 세상 끝까지 달아날 수 있기를 나 감히 바라고 또 바랬다.“

 

“......”

 

그리고 네가 아버님께 매질을 당하던 날, 나 역시 회초리를 맞으며 이를 악물고 여쭈었다.

아버님의 아들, 이 집안의 장손, 이 가문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왜, 어째서, 이토록 버거운

무게를 지고 살아야하느냐고. 나는 어째서, 늘 다른 이들을 먼저 배려하고, 앞서 생각하고,

또 반듯해야하는 거냐고, 도무지 아버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온전히 받들 수도 없다고.

 

헌데, 그분이 뭐라 답하셨는지 아느냐. 내 뜻과, 네 뜻이 다르다면, 너는 네 자식에게 달리

가르치면 된다고 하셨지. 다만, 지금은 내가 당신의 자식으로 났으니 당신을 따르라하셨다.

내가 이리하면 이리할수록, 당신 눈에는 부모 뜻을 거역하는 못된 자식으로 보일 뿐이라고.

차라리 화를 내셨다면 맞섰을 텐데, 자분자분 말씀하시고는 치던 회초리도 놓으시더구나.“

 

“......”

 

그 순간 나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고,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내가 난 자리가 이곳이라면 이번 생은 이리 살다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후에 난 차라리 편안했다. 다만 한 가지, 너만은 내려놓을 수도, 덜어낼 수도 없더구나.

하여, 나는 결심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지우고 살아도, 내 안에 사는 너만은 지켜내겠다고.

허니,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오늘의 별리도 꿈만 같겠지.“

 

“......”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목이 메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또 다시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형돈은 지용의 품에 제 얼굴을 묻은 채,

파장을 향해 달려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놀이판에 눈길을 쏟는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414

 

 

 

되련님, 지는 다음 생에 태어나믄 광대로 날 거구만유. 그려서 우리 되련님 딱 찾아가지고

매일을 하루 같이 웃게 해드릴 거예유. 그때는 한상에서 밥도 먹고, 실없는 농도 주고받고,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방방곡곡 내키는 대로 싸돌아댕기믄서 시상구갱도 맘껏 하구유.

되련님은 창()이 좋다고 하셨응께 노래 한가락 구성지게 부르고, 이놈은 그 가락에 맞춰

사람들 배꼽 뺄 만담을 늘어놓으면 밥벌이는 솔찮이 되지 않겠어라? 암만 그렇고 말구유.“

 

너무 소박해서 뭉클하기까지 한 정인의 바람이 지용을 울린다.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당연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이토록 멀고 아득하거늘, 너는 당장이라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꼭 그러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렇게 말해주는구나 . 네가 나를 또 다시 살게 하는구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내 꿈은 한량에, 난봉꾼, 잡놈에, 유랑객이니 아주 꼭 맞는다.

네가 만담을 늘어놓으면, 나는 술을 친구삼아 창을 하고, 네가 재주를 부리면, 나는 끽연을

벗 삼아 장단을 맞춰주마. 우리 서로의 온기를 이불 삼아 잠들고 깨면서 그렇게 살다 가자.

그때는 내가 너를 좀 더 은애하고, 더 많이 연모하고, 이 마음 다하여 아끼고 또 아끼마.“

 

, 그때는 되련님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하고 사시오. 대책 없는 한량이든, 답 없는

난봉꾼이든, 한심한 잡놈이든, 바람처럼 떠도는 유랑객이든, 그 무엇으로 나셔도 이놈이 딱

알아보고 옆에 붙어서 죽어도 안 떨어질 것잉께 지금처럼 보내버릴 생각일랑 하지 마소.“

 

네 녀석이나 가겠다고 강짜부리 말거라. 어림도 없으니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게야.”

 

그 무엇을 핑계 삼아서라도 꼭 한 번은 쏟아놓고 싶었던, 쏟아야만 견딜 수 있었던 심중을

서로에게 터놓는 사이, 덜미가 한창이던 놀이판도 끝나고, 사람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밝기만 하던 해는 서산 저편으로 뉘엿뉘엿 사라져가고,

차츰 짙어지는 땅거미가 때가 왔음을 일러주는 것 같다. 지용은 짐짓 웃으며 손을 내민다.

 

형돈아, 이만 걸어야하지 않겠느냐......”

 

, 이제 걸어야지라......‘

 

형돈은 지체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용을 따라서 웃어 보이며 그가 내민 손을 잡는다.

 

형돈아, 인생사 한낱 일장춘몽이라 해도 너라는 꿈을 꾸었으니, 그것이 하룻밤 꿈일지언정

나에게 그 무슨 회한이 남겠느냐. 또 이 꿈에서 깨지 않을 것이니 그 무슨 슬픔이 있겠느냐.

추억을 벗 삼고, 그리움을 길 삼아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라도, 내 반드시 너를 찾을 게다.

그러니 우리 지금을 이별이라 하지 말자. 이별은 마음이 떠난 사람과 하는 것이니......“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형돈은 그저 깍지 낀 두 손을 위로 들어 보이며 해사하게 웃는다.

지용 역시 형돈을 따라 두 눈을 반달로 접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거리를 걷는다.

길어지는 그들의 그림자 뒤로 여느 날과 다름없는 어둠이 내리고, 어제와 같은 별이 떴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고, 영영이라도 달라지지 않을 두 사람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다.

 

 

 

 

 

 

돌이켜 보니, 이 글은 지용이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생이라는 장치를 통했을 때뿐이었죠.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현재의 제 깜냥으로는 도무지 이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자,

이미 오래전 제 임계량(한계)을 넘어선 어딘가에, 제 마음이 방치되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이 아이를 아낄 때 그러했듯 제 나름의 최선을 다했기에 그 어떤 후회도 없다는 점과,

이 글을 기다려주시던 분들이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약속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접어버렸을 텐데 이럴 때는 총기가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는!!)

 

잠이 쏟아지거나, 끊임없이 갈증이 나거나, 단 음식이 당기거나, 때로는 초초하기도 했지만

이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말을 거는 순간순간이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20150318Am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