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Review/시(詩)의속삭임

[시(詩)가 말을 걸다] 네가 나를 살다 갔다.

Betty1983 2015. 3. 25. 02:22

 

 

 

 

누가 나를 살다 갔다     作 : 김왕노

 

내 몸은 부르지 않았을 텐데

내 꿈속에 밤새 꽃으로 피어 살다간 이는

 

내가 잠결에 그 누구를 불렀던가 

 

못 견디게 그리워 

꿈속까지 찾아가 제발 와서 살다가라고 투정부렸던가

내 꿈의 하루를 살다간 저 흔적

 

다 헤아리지도 못하는

쓸어버리지도 못할 나를 누가 살다간 저 붉은 흔적

내 머리맡에 밤새 낭자하게 쏟아진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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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넓은 집에서 너랑 같이 밥을 먹고, 물이 아주 많은 배를 깎아 먹고 싶어.'

 

양배추, 파프리카, 포도, 아침에 주스로 갈아 먹을 야채와 과일들을 정리하다 말고 뜬금없이 떠오른 너의 한마디.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가버리는 형광등처럼 그건 정말 뜬금없고 성가시며 우스운 일이었어.

 

오늘은 사수와의 통화조차 불가능할 때가 잦아서 모든 일을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내일 업무의양이 많거나 적거나 그것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이미 들쑤셔놓은 벌집 같은데,

양배추 1/4통과 파프리카 세 개를 다듬는 일마저도 녹록치가 않아서 시간을 잡아먹고 또 잡아먹고 있는데,

그 와중에 수면 위로 떠오른 그때의 너는 한강변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처럼 나를 흔들어 놓았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서툰 칼질을 멈추지 않은 채, 나 스스로를 마음껏 비웃어줬어.

'어이구, 눈물나게 감상적이시네. 너 되게 속 편하고 한가한 가보다? 아니면 아직 덜 피곤한 모양이지?'

썰고, 담고, 설거지를 하고, 목욕을 하고, 빨래를 돌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서 나는 또 생각했어.

 

천지개벽이 일어나거나, 내가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그 일이 용케 이루어졌대도,

너와 나는 서로를 견디지 못해서 부딪히고, 또 부딪히다가 끝내는 서로에게 멀미를 느꼈을 거라고.

현실에 벽에 부딪힌 우리는, 그 무시무시한 무게에 형체도 없이 짓이겨진 채,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을 거라고.

누구의 탓도 아닌 일로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고, 미워하고, 증오하다 끝내는 후회하고 말았을 거라고.

 

서로를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잠재적인 반역자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현실적인 가정들을 나열하며 백 번 맞는 이야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도 나는 생각했던 것 같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건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날들을 겪어내는 것이었다고.

 

너와 부딪혀서 깨지거나, 서로의 상흔을 서로를 통해 확인하며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내게 되더라도,

넘을 재간이 없는,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감당할 수 없었을 냉엄한 현실 앞에서 매일을 환멸에 차있더라도,

그렇게 질려하고, 지겨워하다, 끝내는 포기하고 말 그 모든 시간들을 기꺼이 겪고 싶었노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들은 나를 아프게 했고

눈을 뜨거나, 감거나, 말을 하거나, 길을 걷거나, 숨을 쉴 때마저도 느껴지던 너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은 불행이었대도,

그런 까닭으로 네가 이 세상에 온전히 살아남아 오늘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거라면 난 차라리 감사할래.

 

고마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지 않을 테지만, 이루어지지 않아서 꿈꿀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