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내게로 올 때] 무모하거나 용감하거나.
인간이라는 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존재인 거야.
-파울로 코엘료 : 브라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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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무렵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집이 있는 지하철 역에 내렸을 즈음에는 약간 더 굵어져 있었고 수중에 우산이 없었던 나는 잠시 갈등했다.
'떨어진 우유와 요구르를 사서 귀가할 것인가.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갈 것인가.'
역사 계단에 서서 손을 내밀어 손가락 끝에 닿는 빗발을 가늠하거나, 깜깜한 하늘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던 그 순간,
내가 셈하고 있었던 것은 아침 밥을 대신할 우유나 요구르트 따위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 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발걸음을 돌려 일초라도 빨리 내 몸이 젖지 않을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날의 빗방울이 조금만 더 굵었더라면,
아니, 바로 다음날 당신과의 약속이 예정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당신을 만나면 내가 도울 일이 있었고, 아마도 밤을 세워야 할만큼 만만치 않은 양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일이 끝나면 곧 떠날 당신을 배웅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기꺼이 물웅덩이 속으로 빠지게 했다.
장을 보는 잠시 사이, 거짓말처럼 굵어진 빗방울이 처마를 세차게 두들길 때,
그 앞에서 아주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내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던지듯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초단위로 기세가 거세어지는 빗발이 시야를 가리고,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코트마저 흠뻑 적셨을 때,
처음에는 짜증이 솟다가, 그 다음에는 '이게 무슨 미친짓이람.'싶어서 피식 웃음이 났던 것 같은데.
머지않아 가방이며, 옷이며, 머리까지 온통 젖어버렸을 때는 외려 편안했고, 심지어는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옷이 젖을 거라는 사실, 세탁에 대한 스트레스와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염려까지,
빗속으로 발을 내딛기로 결정짓던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는 무수한 생각과 가정, 걱정과 갈등이 소용돌이 쳤지만,
흠뻑 젖어버리고 나자 사고는 정지되고,'에라이 모르겠다.' 그저 웃음이 날 따름이었으니.
만사가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고, 애써 어딘가를 찾아다니고 싶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고 싶지도 않은 내가,
모든 관계는 최소한으로, 말은 꼭 필요한 만큼만, 남는 시간이 있다면 오직 나만을 위해 쓰고 싶은 내가,
'발을 뺄까, 모른 척 돌아설까, 배려고 나발이고 죄다 때려치울까.' 무수한 생각 끝에 마침내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
전지 한 번에 말끔히 사라지는 곁가지처럼 나의 불필요한 사고 또한 거세 되었다.
모든 선택에는 이면이 따르듯, 그날의 빗방울은 나로 하여금 감기를 앓게 했고, 긴 위장병의 신호탄이 되었지만,
당신이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설령 믿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내게 바보라 말할까.
나는 여전히 사람이 성가시고, 만사가 귀찮으며, 대부분의 날들이 무의미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나의 길이라면,
언젠가, 이 생(生)에 한 번쯤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 스스로를 향해 말해볼 수도 있을까.
'산산하고 고단한 이 삶, 내게 있어 모든 것이 무의미 했어도, 그 모두가 무의미하지는 않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