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발자취] 그편을 택합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나이 서른에 내가 바라는 바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마흔에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
쉰이 되자 나는 하늘이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 대해 각각 어떤 계획을 마련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순에 나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그것을 따르며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일흔이 되고 보니 나는 이제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공자- |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행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이것은 과연 옳은 판단인지, 그로 인해 다치는 사람은 없는지,
누군가 꼭 다쳐야만 끝을 볼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사는 날이 쌓여갈수록 흑과 백이 뒤섞여 하나의 색(色)이 되었고,
옳고 그름 또한 내가 처한 상황과 선택에 따라 반쪽짜리 가면처럼 전혀 다른 얼굴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거기서 내가 고를 수 있는 카드는 몇 장 되지 않을 때가 잦았는데, 가능하다면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그럴 수 없다면 내 사람만은 지키는 쪽으로,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내가 다치는 편을 택했던 것 같다.
덕분에 서른이 넘은 이날까지 매순간의 나를 돌아보고, 습관적으로 의심하며,
내가 가고자 하는 길, 행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나 스스로를 향해 몇 번이고 동일한 질문을 되풀이하게 된다.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이며, 그를 톨해 궁극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냐'고.
욱하며 불처럼 타오르는 성질머리, 까칠하기 짝이 없는 말 본새, 일부분 타고난 차가운 성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 멋대로 굴지 않고, 다른 이들과 어느 정도 화합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노력 덕분일 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하듯 나 역시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고 늘 같은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그럼에도 나의 심중을 내색하지 않고, 침묵으로 다스리며, 온전한 나의 힘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이유는,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말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순간의 위안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 실존 너머의 본질을 들여다 보라는 그 말이 내게는 늘 절실했고, 또 필요했다.
이 순간 나는 매번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늘 동일한 문제로 소요를 일으키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내게도 보이는 것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고, 소란스럽고, 유난스럽고, 호들갑스러운 당신의 모든 것이,
(당신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내가 이날까지 귀히여겨온 사람들마저 퇴색시킨다는 것을 아느냐고,
당신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하더라도,
진정 그런 뜻이 아니었더라도, 모든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면 끝내는 당신의 과오라는사실을 모르느냐고.
허나, 세상에 나쁘기만한 일은 없다고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끝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
당신의 무수한 소리들이 나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니 그 역시 고마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모든 것을 마치고 나면 애초에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의 방향이 명확하고, 명징하게 내 눈에 보일 것 같다.
이르고자하는 곳에 확신은 가질 수 없어도 평온한 가슴으로 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갈 그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