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Review/영혼의 발자취

[영혼의 발자취] 이제 무엇도 간구하지 않음으로.

Betty1983 2017. 5. 24. 15:41





당신은 낮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나를 막다른 곳으로 이끄시니 

나는 아침에 이르기까지 부르짖었나이다.

당신은 사자처럼 내 모든 뼈를 분지르고

낮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나를 막다른 곳으로 이끄시나이다.

제비처럼 나는 울고 비둘기처럼 탄식하면서 부은 눈을 들어

"주여, 나는 괴롭나이다. 나를 지켜주소서" 하였나이다.


-성무일도 中에서-








 

나는 괜찮다.

평소보다 더 예쁘게, 평소처럼 색(色)과 디자인에 맞춰 옷을 코디해 입고, 새로 산 머리띠를 하고 단정한 얼굴로 출근한다.

고객에게는 최대한 친절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응대를하려고 노력하고, 사수와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웃는다.


의미도, 취미도,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잃었지만 영어 온라인 스터디를 신청해서 최소한이나마 공부하고,

병원을 다니면서 아픈 곳을 치료하고, 의사에게는 적절한 칭찬이나 상황에 맞는 말을 건네면서 편한 분위기를 만든다. 

제법 익숙해진 헤어디자이너에게 느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노상의 사장님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렇게 그 어느 때 보다도 씩씩하고, 밝고, 평온하기 그지 없는 나는 지극히 괜찮다.

모두 잠든 시간, 하늘에 뜬 별을 보며 빨래를 널고, 화장실에 끼인 물때를 보아 넘기지 못해서 칫솔을 쥔 채 사투를 벌이며,

정리할 것도 없는 방을 매일 정리하고, 새벽으로 달려가는 시간, 영작을 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생전 쓰지 않던 인터넷뱅킹이며, 폰뱅킹까지 가입해서 시(時)에 구애 받지 않고 계좌를 정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면서.


한주 내내 필라테스부터 요가까지 모든 수업에 참석해서 죽자 사자 땀을 흘리고,

그저 흘려버릴지라도 영어 MP3를 귀에 꽂고 있거나, 책을 붙들고 무작정 읽거나, TV라도 쳐다보면서 나는 늘 의연하다.

갈수록 눈부신 햇살과, 유모차를 미는 부부와, 다정한 연인과, 딸의 손을 잡고 웃는 아빠가 지나가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이방인이지만 나도 그들 사이에 속해있는 척,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는 낯선 이의 살을 관조하는 것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나는 점점 평온해지고, 조용해지고, 또 태연해진다.

견고한 일상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내 마음이 엉망인 것을 나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언제든 내게 올 것들을 예비하도록,

나조차 잊은 나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평소보다 더 살뜰히 내 사람을 챙기고, 그렇게 갈수록 더 반듯한 얼굴을 하면서.


그것이 언제든 이 땅에서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언제 세상에서 사라져도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지도록, 사라진 것이 외려 현실 같지 않을 만큼 더 없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당신이 내 곁에서 사라진 뒤 나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었지만,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완벽하게.

어리석었을지언정 당신을 붙들고 그 흔한 원망이라도 했다면, 이 영혼이 믹다른 골목에 이르러 죄다 부서지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견고한 일상에 틈이 생기고, 갈라지고, 무너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이 오면,

나는 소리없이 미치고, 조용히 돌아버린 채, 내가 그토록 기를 쓰고 버텼다는 것조차 잊고 스스로를 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그날이 온다면 내가 이미 넘치게 했고, 또 그때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반증일 테니까.


당신이 떠나리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듯이,

사고가 나리라는 예감조차 없었듯이, 당신이 떠난 뒤의 내 삶 또한 계획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되었다.

허나, 괜찮다. 이제 더는 나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삶도, 죽음도, 그 무엇도 열망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