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Review/내게로 온 문장

[문장이 내게로 올 때] 만다라(曼茶羅), 인생의 상징.

Betty1983 2018. 3. 28. 14:29








티벳 승려들은 고운 색모래로 만다라를 그린다.

원과 사각형의 기하학적 반복으로 채워지는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 만달라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밀교에서 발달한 불교 미술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미적인 측면보다는 담고 있는 내용과 제작 과정이 중요하다.


우선 만다라가 담고 있는 내용은 우주의 진리와 깨달음의 경지이다.

보편적 진리의 심오함을 기하학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행이 된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달이나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작은 금속의 관에 모래를 담고 이를 진동시켜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바닥에 그려진다.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땅바닥에 얼굴을 가까이한 채

정성을 다해 만다라를 그려가는 승려들의 진지함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중략)


만다라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미적인 색감과 모양과 승려들의 정성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만다라가 완성과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만다라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쌓여진 그 순간,

승려의 모진 손이 둘레의 가장자리부터 중앙까지를 훑는다.

망설임 없는 그 손짓에 모래는 뒤섞이고 선명한 색생은 혼합되어 빛을 잃는다.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만다라가 인생에 대한 상징이었음을.


나의 모든 노력과 정성은 집착이 되어 모래처럼 쌓여가고, 

우리는 이것을 붙들고 싶지만 결국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나마 한줌이라도 움켜쥐고 싶지만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作 : 채사장-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中에서-





몇 시간, 몇 년, 온정성을 다해 그렸던 그림을 완성의 순간 가차없이 쓸어버리는 것처럼,

삶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완벽하고 완전해지는 순간, 충일한 그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고,

신(神)이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의 본질과 지난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내게 가르치고자 고뇌를 선물하는 것이라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랜 날들을 나의 불완전함과, 끝나지 않는 사유와, 매사 완벽하고자하는 욕망과 싸워나가야 할까.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열망조차 또 다른 집착이고,

이 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전부터 지어온 나의 카르마(karma)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벗어나야할까.

나는 또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삶의 역사를 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미 어긋난 사람과 재회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그저 종결을 바랄 뿐, 절실하게 이루고자하는 꿈도, 삶을 접지 못할 만큼 절대적인 염원 같은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진심을 기만한 당신에 대한 분노,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라는 나의 심사가 원죄가 됨을 알지만 그건 덜지 못했다.)


이것 또한 내게 삶을 가르치기 위한 신의 안배라면 나는 그저 받아들여야할까.

한때 행복하기를 바랐던 나의 염원까지도 또 하나의 집착이고, 내가 정성을 다해 쌓아올린 모래성이었음을 깨닫는다.

움켜쥐려할수록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던 찬란한 소망과 절실한 소원들은 시작부터 사라지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니,

애당초 내게 온 당신 또한 한낱 바람, 신의 손길로 모질게 쓸어버리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환영이었으리라.


더 없이 명징한 진실은 절대로 아물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지만,

허리를 숙이고 정성을 다해 삶의 근원을 그려가는 승려처럼, 완성의 순간 미련 없이 그 모두를 지워내는 모진 손길처럼,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그중 으뜸인 사람의 인연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내가 겪은 일들이 하나의 만다라를 완성하고 지워내는 숙명의 반복임을, 그것이 인생임을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