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Drama/단편愛빠지다

[내 마음속의 작은 이야기] 그대 내게 다시(下)

Betty1983 2013. 5. 22. 17:08

 

 

 

                

                    

                                                                                                              지난한 길을 돌고 돌아서야,

                                                                                           이제 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이 자리에서,

                                                                                         여전히 불고 있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한다.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떠나지 말아요.’

                                                                                        그 시절 나에게 필요했던 말은 오직 이것뿐.

                                                                우리 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 짧은 문구에 불과했다는 걸.

 

                                                                                                                                -Betty : 無題-

 

 

 

땀으로 젖어있는 전신이 무색하게 등줄기에서 소름이 끼쳤다. 연희는 이불을 걷어낼 엄두도

못 내고 무릎만 옹송그렸다. 잠깐 새 차가워진 두 팔을 무릎에 얹고 젖은 얼굴을 묻었을까.

눈물로 가려진 시야, 무거운 머릿속으로, 그 언제,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생생히 울려왔다.

 

 

 

“추문을 돌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네가 그토록 연모한다는 이직강의 목숨까지

위협한 것은 누구도 아닌 너이다. 내 너의 분방한 성품을 염려하여 이례적으로 천추전에서

강론하도록 허하였건만, 네 뜻을 거스르고 궁 밖으로 나돌지 않았느냐. 네가 직강으로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배우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을 때도 조정이 소란했던 사실을 잊은 게냐.

 

아무리 서인의 영수, 영의정의 핏줄이라도 서출을 네 직강으로 중용한 것에 말들이 많은데,

왜 그들이 들고 일어날 빌미를 주냔 말이다. 너의 경솔한 언행으로, 신분을 넘어선 인재를

등용하고 나아가 당파를 초월해 관직을 하사하려던 아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병판이 영의정의 눈치를 살피느라 대놓고 거론치만 못할 뿐, 너와의 혼담이 깨지게 된다면,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사실을 나서서 캐려고 들것이야. 그럼 네게까지 화가 미치게 돼.“

 

“그렇다고 원치도 않는 자에게 시집을 가란 말씀이십니까. 소녀가 마음에 둔 사람의 태생이

서출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평생 이룰 수 없는 것도 가슴이 미어질 지경인데, 어찌 아버님과

척을 지고 있는 자의 아들에게 하가까지 명하십니까. 차라리 평생 혼자 살겠습니다. 그자의

아들은 얼굴만 봐도 진저리가 난단 말입니다. 혼인! 혼인!! 혼인!! 그깟 혼인이 뭐라고요.“

 

“용상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이 아비도, 명성이 자자한 고관대작들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연명하는 백성들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지는 못한다. 내가 원하는 정치를 하나

펼치려면 말 많은 대신들에게 한 가지는 내주어야 하고,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는 대신 내게

머리를 조아려야하지.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유일한 소망일 백성들도 노동을 일삼아야 해.

 

하물며 너는 무엇이냐. 천자의 여식으로 태어나, 만인의 존경을 받고 갖은 평안을 누리면서

무엇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게냐. 연모하는 이를 지키고자 한 네 마음은 그토록 얄팍한 게냐.

지키고자 했으면 응당 희생을 감수할 생각도 해야 하거늘, 어찌 그다지도 철이 없는 게야!!

혼인할 수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직강을 지켜줄 수 없다. 종묘와 사직을 보존해야 하느니.“

 

“제가! 제가 천자(天子)의 여식이길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소녀가 아버님과 연(聯)을 끊고,

용상에 앉으신 전하의 백성이 되면, 그리하면 혼인을 파기해 주시겠습니까. 소녀가 더 이상

공주가 아니면 병판이 며느리로 들이려고 나서지 않을 게 아닙니까. 마음에도 없는 이에게

시집가서 송장처럼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겠습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뭣이라 아무리 철이 없기로 아비 앞에서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치 않고 방자하게 굴다니!

제 아무리 공주의 신분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여봐라! 이시간부로 공주를 처소에 연금하니

내금위장으로 하여금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도록 지키게 하라. 공주가 혼인하는 당일까지,

공주는 처소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설 수 없다. 이를 어기면 누구랄 것 없이 참수에 처한다.“

 

곧이어, 일사분란하게 처소 앞을 가로막는 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들었을까.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내금위장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서성거리던 연희의 의식이 제 자리를 찾았다.

무릎 위에 맥없이 묻혀 있던 그녀의 고개가 소스라치듯 들렸다. 감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 당신이었어. 무명(無名)과 나를 추문으로 매도한 것도, 나를 빌미로 그를 겁박하여,

비(悲)로 하여금 내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만든 것도, 내 혼인이 앞당겨 진 것도 모자라

그에게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한 것도, 모두 병판의 아들, 지금의 내 약혼자, 당신이었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선 연희가 코트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동그랗고 차가운 것,

비(悲)가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그녀의 손에 쥐어준 현생의 삶이었다. 그때는 무엇도 쉬이

포기할 수 없어 돌아섰지만, 모든 기억이 돌아온 이상 현준과 남은 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설령 현준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어, 자신이 선택이 상처가 된다 해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비(悲)와 함께할 수 없어도 당신은 아니야.’ 연희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뛰쳐나간다.

 

 

 

 

               Title : I.O.U.   Song By : Carry&Ron

 

     You believe that I've changed your life forever.
     And you're never gonna find another somebody like me.
     And you wish you had more than just a lifetime
     to give back all I've given you.
     And that's what you believe.

 

     당신은 믿고 있어요,

     내가 당신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고.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제가 당신에게 준 모든 사랑을 갚기 위해서

     당신은 이 삶이 영원하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믿을 뿐 이예요.

     But I owe you
     the sun light in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way.

     하지만 저는 당신께
     아침의 햇살과
     시간이 앗아 갈 수 없는 모든 
     사랑스러운 밤을 빚지고 있어요

     And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I'll ever have to pay.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삶 이상의 것을 빚지고 있어요.
     그것은 제가 언제까지나 갚아야 할
     가장 달콤한 빚이죠.

     I'm amazed when you say
     it's me you live for.
     You know that when I'm holding you
     you're right where you belong.

     당신이 사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했을 때

     나는 정말 놀랐어요.
     제가 당신을 안고 있으면 그 곳이 바로
     당신이 있을 곳이란 걸 당신도 알지요.

     And my love, I can't help but smile
     with wonder when you tell me
     all I've done for you
     Cause I've known all alone.

     내 사랑, 내가 당신께 해 준 일을
     당신이 내게 말하자 난 그저 놀라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오직 혼자만 알고 있었거든요.

    

     But I owe you
     the sun light in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way.

     하지만 저는 당신께
     아침의 햇살과
     시간이 앗아 갈 수 없는 모든
     사랑스러운 밤을 빚지고 있어요.

     And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I'll ever have to pay.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삶 이상의 것을 빚지고 있어요.
     그것은 제가 언제까지나 갚아야 할
     가장 달콤한 빚이죠.

     Cause I owe you
     the sun light in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way.

     하지만 저는 당신께
     아침의 햇살과
     시간이 빼앗아 갈 수 없는 모든
     사랑스러운 밤을 빚지고 있어요.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I'll ever have to pay.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삶 이상의 것을 빚지고 있어요.
     그것은 제가 언제까지나 갚아야 할
     가장 달콤한 빚이죠.

 

 

 

 

 

“우리결혼 이제 겨우 한 달 남았어. 갑자기 파혼이라니 말이 돼? 난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

불과 며칠 전까지도 드레스 보고 예물 고르던 너야. 너랑 나, 싸움 한 번 안하고 지냈잖아.

뭐가 문제야?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말해봐. 내가 알아야 해결을 하지.“

 

‘당황스러울 법도 하겠지.’ 연희는 전에 없이 현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쓰디쓴 커피만

말없이 삼켰다. 현준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대해, 최소한의

연민은 갖고 있다 믿었던 지난날들에 대해, 자신도 놀랄 만큼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연희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태연하게 그가 준 반지를 꺼내 건넨다.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요. 문제라면 그게 문젠데 이것도 선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젠가요?”

 

연희의 대답을 들은 현준의 표정이 예상대로 뜨악했다.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그가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쳐다본다. 현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그래 네가 나만큼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어. 네가 날 나쁘지 않은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만났다는 것도 알아. 아무리 그래도 함께 보낸 삼년이 이런 말 한마디로 간단하게

정리 될 만큼 너한테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이 너한테 그렇게 하찮았어? 그런 거야?“

 

‘구역질나.’ 마음을 운운하는 현준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딴눈을 팔았을 때에도

치솟지 않던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연희는 손가방에서 구겨진 사진을 꺼내 들이밀었다.

사진 속에 박힌 자신과 내연녀의 다정한 모습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놀랄 건 없어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변명도 하지 말아요. 듣는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선배가 여자가 있는 걸 알았을 때도, 선배랑 결혼하겠다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난 선배가 여자가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었거든요. 부모님이 선배를 좋아했고, 선배 말대로,

선배는 결혼하기 괜찮은 남자였으니까. 선배도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 은근히 속물 이예요.

선배랑 결혼해서 적당히 살면 그만이란 생각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근데, 더는 안 되겠어요.

 

서른 남짓 청첩장도 다 돌린 여자가 이런 말 하는 거 황당하겠지만 나도 내 인생을 살래요.

더는 남들 시선에 얽매여서 살고 싶지 않아요. 마음에도 없는 결혼, 적당히 묻어가는 인생,

꿈에서도 바란 적 없어요. 선배가 나한테 잘해 줬다는 거, 우리 부모님한테 더 잘했다는 거

나 모르지 않아요. 그래서 고맙고요. 하지만 선배 옆에서 병든 화초처럼 말라죽긴 싫어요.“

 

말을 마친 연희가 현준을 팽개치듯 놓아두고 뛰었을까. 뒤따라온 그가 그녀의 팔을 잡는다.

 

“정말 왜 이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난 절대 너 포기 안 해. 아니 안할 거야!!”

 

 현준의 완력에 꼼짝없이 붙들린 팔과 결연한 그의 말들이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휘이익.’

문득 귓가에 들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녀의 의식은 다시 한 번 시간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잠깐 새 귓전을 맴돌던 바람소리가 가셨을까. 눈을 뜨자 전생의 자신과 현준이 마주서있다.

 

 

  

 

 

 

 

“제 아무리 정혼자라고 하나 예가 어디라고 내 허락도 없이 들어오십니까. 당장 나가세요!”

 

“왕명까지 어겨가며 스승님을 만나게 해드렸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외려 성을 내시다니요.

왜요, 그자에게 야반도주하자고 청하였다가 거절이라도 당하셨는지요. 하긴, 연모하는 이가

그저 꽃놀이나 즐긴 것이라 대놓고 무안을 주었으니, 어디 공주마마의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럼 공주의 자리를 버리고자 한 내 의중도, 둘이 떠나기로 한 계획도 이미 알았던 거야?’

내금위장의 말을 듣는 연(聯)의 얼굴에 파르라니 경련이 일었다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칼을 차고 서있는 남자의 몸짓과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대체 비(悲)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서출인 신분을 들먹이며 영상과 그분의 어머니를

볼모로 겁박이라도 하셨습니까! 그저 나 혼자 품은 마음이라 아바마마께도 말씀을 올렸거늘

나를 대전에 벌세운 것으로 부족하셨습니까. 혼례 날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감시하는데,

내가 그분께 무엇을 할 수 있다고요. 어찌했기에, 담대하신 분께서 두려움에 떠신 답니까.“

 

“소문은 그저 소문일진데 공주마마께서 나서서 아니라고 해명하신 일을 놓고 겁박이라니요.

소신 다만, 여기서 소문이 더 확대된다면 마마께 사약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전하의 의중을

여과 없이 전했을 따름입니다. 공주는 천자의 금지옥엽이라 반역죄만 아니라면 웬만한 흠은

덮어지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팔도의 백성에게까지 소문이 돈바 마마께서

혹시라도 불경한 일에 연루되신다면 더는 마마를 보호해 드리기가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소문의 배후가 병판이란 사실을 내 모를 줄 아십니까. 감히 전하의 의중을 들먹이다니요!”

 

“공주마마 황공하오나 아무런 증좌도 없이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도

서출과 정분이 났다는 풍설로 세간의 구설에 오르셨으나 증좌가 없어 무사하지 않으십니까.

현실이란 본시 그런 게지요.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만사를 죄지 우지 하게 됩니다.

 

소신은 불씨를 지폈을 뿐, 그 불씨가 커져 초가삼간을 태운 것은 바람의 힘이지요. 바람이

폭풍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입니다. 마마의 목숨이야 버리면 그만이라 하실지 모르겠사오나,

마마의 섣부른 행동으로 긍지에 몰리신 전하를 생각하셔야지요. 일국의 군주가 아니십니까.

일국의 안위와 공주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마당에 서출 따위의 명줄이 성하겠습니까.“

 

내금위장의 말을 듣는 연(聯)의 입술이 앙다물어졌다. 제가 누군가의 어여쁜 여식이기 전에

금상의 금지옥엽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목을 조였다. 선택할 수가 없었던 태생처럼,

새삼 자신이 버린다고 버려지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연(聯)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일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살아서 원삼을 입고 지옥불로 걸어가지요. 헌데, 이것은 알고 계십니까.

한 지붕을 이고 사는 이가 지옥에 살면, 곁에 있는 이도 아비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요.

존귀한 의빈의 자리도, 왕실의 일원이 당연하게 갖는 부귀와 영화까지, 마음껏 누리십시오.

대신, 나를 안아도 안는 것이 아닐 것이고, 나를 가져도 갖는 것이 아닐 것이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를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다음 생이 있다 해도 기억하나 남기지 않을 것이니.“

 

결연한 연(聯)의 말을 듣던 내금위장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놓고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투명한 연(聯)의 눈동자는 어린 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곳에 서린 절대적인 결의가

그를 주저하게 했다. 허나, 그녀의 남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온 지난날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너에게 놀이동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지금은 끔찍한 악연이겠구나.

허나 그래도 나는 너를 포기 못해. 그자만 너를 여인으로 품은 것이 아니니. 포기 못한다.‘

연(聯)이 행여 제 마음의 동요를 눈치 챌까. 황급히 어깨를 놓은 그가 빠르게 뒷걸음 쳤다.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한 가지 제가 가질 수 없다면 마마께서도 가지실 수 없을 겁니다.”

 

 

 

그의 말이 귓전에 후벼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은 뒤에야, 그녀의 의식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마치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현준에게 붙들려 있는 팔과 잔뜩 구겨진 그의 얼굴만이

자신이 서있는 현실을 말해줄 뿐, 껍데기뿐인 현실을 딛고 서있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미 정해진 일에 더는 서로 기운빼지 말아요. 선배의 의사가 어떻든 나는 결혼 안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날 납득시켜 봐.”

 

“선배를 이해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면 파혼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납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에요. 누군가를 만나다 결혼 애기가 나왔고, 결혼할 뻔 했지만 깨지는 거잖아요.

이게 뭐가 그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흥분하고 그래요? 선배 집은 선배가 책임져요.

뭐, 말 꺼내기 어려우면 내가 사진 들고 직접 가줄 수도 있어요. 선배 좋을 대로 하세요."

 

‘당신이 한 짓에 비하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가시 돋친 속엣 말을 삼키며 돌아선

연희의 뒷모습이 언젠가의 그것처럼 결연했다. 현준은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절로 한숨이 뱉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만개한 벚꽃이 무색하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어깨위로 문득 한기가 스며와 연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차가운 손을 들어

양 어깨를 비볐을까. 은회색 카디건이 그녀의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놀란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면 비(悲)가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웃고 있다.

 

“다시 만날 때는 웃는 얼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늦은 모양이네요. 힘든 결정

혼자 내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이제부터는 당신 마음의 짐 내가 들게요.

당신도 나도 혼자 감당하는 건 여기까지만 합시다. 당신 집에 가서 무슨 비난을 듣게 되던,

설령 그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이제는 내가 같이 있을 겁니다. 연(聯), 우리 같이 가요.“

 

‘어떻게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복받칠 수 있을까.’ 연(聯)은 무작정

비(悲)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쏟는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고 살았을까요?”

오랜 시간을 돌아서야 전해진 연(聯)의 마음이, 비(悲)의 눈가를 슬픈 기쁨으로 젖게 했다.

 

“당신이 나를 잊은 시간만큼,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살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누구든 마음의 끈을 놓지 않으면 그 인연은 끝나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인연이라면 지금 동을 돌려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나의 반복된 과오에도 불구하고,

내 기다림이 헛되지 않아서 당신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비(悲),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정말 영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내 짐을 당신에게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까지도 충분하고 또 넘치니까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게요. 당신을 위해서 꼭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염려 말고 날 보내 주세요. 내 힘으로 내 짐을 내려놓고 꼭 다시 당신을 찾을게요."

 

어렵사리 포옹을 푼 연(聯)이 비(悲)의 손을 꼭 잡았다가 이내 놓았다. 비(悲)가 그랬듯이

애써 웃어보려는 연(聯)의 얼굴이 아프게 비(悲)의 가슴에 남는다. ‘연(聯)아, 가지마라.’

비(悲)는 애달픈 마음을 감추며 연(聯)을 따라 웃어본다. “꼭,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가마.”

 

 

 

“아버지, 먼저 말씀드리지만 선배가 뭐라고 하든, 저는 이 결혼 안 해요. 그렇게 아세요.”

 

여행을 떠날 생각으로 짐을 싸러 들어온 길,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는 현준의 모습을 본 순간, 연희는 반사적으로 차가운 말을 내뱉는다.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진저리가 났다. “당신 정말 싫다......‘

연희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현준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아버지가 대신 나섰다.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니다. 남편이 될 사람이 딴눈을 팔았는데 당연히 마음이 안 좋겠지.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김서방이 뉘우치고 있다니까 이쯤해서 모른 체해주자.

예방주사 한 번 독하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한 번 실수에 내치면 남는 사람이 어디 있니.“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더는 못 견디겠어요. 저사람 옆에서 잘 살 자신이 없어졌어요.”

 

“연희야, 지금은 김서방이 미워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일이다. 김서방이 너한테 잘하고,

지금 보다 더 너를 사랑해주면 거짓말처럼 덮일 일이야. 너는 살면서 실수 한 번 안하겠니?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너희가 짧은 시간 만나고 결혼 결정한 것도 아니니 이쯤해서 접어라.

아무리 내 딸이지만 너도 잘한 것은 없어.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으니 사람이 배겨나겠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못하겠어요.”

 

“너 자꾸 이 아버지 실망하게 만들래? 어린 애도 아니고 왜 생전 없던 투정이야. 이제 와서

결혼을 엎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야 양가체면도 있고 제 부모 입장도 생각해야지.

나이가 몇 살인데 자기 일 하나 해결을 못해서 집을 소란하게 만들어. 두 사람 다 나가라.“

 

 부녀의 다툼 아닌 다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꿇고 앉아있던 현준이 일어나 연희에게

빠르게 걸어왔다. “연희야, 우선 나가자. 나랑 애기해.” 현준이 연희의 팔을 잡아당겼을까.

 

“당신이랑 할 말 끝났어. 놔!! 이 손 놓으란 말이야!! 더 이상은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이제껏 연희를 만나는 동안 그 어떤 순간에도 볼 수 없었던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현준을

얼어붙게 했다. 당황한 현준이 그녀의 팔을 옥죄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을까. 연희는

그를 밀어내며 성큼성큼 아버지 앞으로 다가섰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해야 할 말이었어.’

 

 

“아버지, 제가 잘 했다는 거 아니 예요. 하지만 제가 아버지 기대를 채워드리려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체면이니, 상대방 입장이니,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단 한번만이라도,

다 내려놓고 제 입장, 아버지 딸 입장에서만 생각해 주시면 안돼요? 내가 죽기보다 싫어요.

아빠 딸이 불행하다고요. 이사람 옆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는 뜻 이예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도 저는 이 결혼 안 해요. 결혼하고 가기로 했던 유학 저 혼자 가요.“

 

 생전 처음 들어봤을 딸의 말대꾸에 어안이 벙벙해졌을 아버지와, 할 말을 잃어버린 약혼자,

분명 집안 어딘가에서 앓아누워있을 어머니까지, 그 모두를 향해 두 눈을 감아버리고 나자,

죄책감을 앞선 홀가분함이 몰려왔다. 진즉 이랬어야 했다는 생각이, 비(悲)에게 가야한다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바쁘게 했다. 제 방에서 대충 짐을 챙긴 연희가 뛰듯이 집을 나선다.

 

 

 

 

무작정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른 건 정말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항로가 정해진 비행기처럼,

정해진 길만을 걷던 지난 날, 다시 태어나면 ‘바람이 되리라.’ 가슴에 품은 은밀한 바람이

이렇게나마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서야,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고 근 삼십년이 된 후에야 뛰기 시작한 가슴의 소리를 따르고 싶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갈 곳을 몰라 다시 돌아온다 해도,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고 해도,

끝내는 비(悲)를 만날 수 없다 해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한발 한발 그를 찾아 가고 싶다.

때로는 현실의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또 가끔은 풀리지 않는 난제 앞에 주저앉아 울어도,

그의 해묵은 사랑이 그녀의 기억을 불렀던 것처럼, 그녀의 열망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비(悲), 이젠 나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날도 오겠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꼭 마마를 먼저 찾겠다고 말입니다. 그사이 잊으신 겁니까.”

 

‘이 목소리는!’ 흠칫 놀란 연희가 옆자리를 돌아보면 두꺼운 책에 시선을 쏟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본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 물을까 하다 연(聯)은 그저 웃는다.

자신이 알거나 모르거나, 심지어 그를 잊은 순간에도 비(悲)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테니.

 

“잊을 리가 있겠어요. 다만, 내가 먼저 당신을 찾고 싶었지요. 이번에는 결국 내가 졌군요.”

 

매화꽃이 만개하던 그날처럼 빙그레 미소 지은 비(悲)가 장난스럽게 그녀를 향해 속삭인다.

 

“이런, 이번 내기에서 지면 제게 시집오셔야하는 건 알고 계시지요? 이제 코 끼셨습니다.”

 

“누구마음대로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짓는 연(聯)의 얼굴이 처음처럼 사랑스럽게 빛났다.

이제야 그토록 사모하던 정인을 온전히 찾은 것 같은 기쁨에 비(悲)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꼭 쥔 연(聯)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자연스레 기댄 비(悲)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비(悲)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연(聯)을 따라 눈을 감는다. 세상가장 평온한 쪽잠이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뎌왔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견뎌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이유로 이한세상 살만하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가.

사랑으로 고통 받았어도, 그로 인해 부박한 이 삶도 아름다우니 몇 번이고 그대 내게 다시.

 

 

 

 

 

 

 

단 한 번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아마 그때 전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때는 채 소녀티를 벗지 못한 어설픈 숙녀였던 한 여자, 결국은 그 말을 전하지 못했죠.

세월을 따라 자연스레 희미해진 기억과 점점 허물어져가는 몸을 앞에 둔 뒤에야 말합니다.

 

‘네가 필요해. 널 사랑해. 날 떠나지마.’ 사람의 진심을 전하는 말은 이렇게 간단한 것을,

결국은, 이렇게 길고 긴 글을 빌어서라도 기어이 말하고 말 그것을 이제 서야 시인합니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며, 앞으로도 영영 사랑한다는 그 말을......

 

 어쩌면 이렇게나마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님들 많이 사랑하세요!!

 

 

                                                                                   -2013年 05月 21日 Pm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