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흐린 날 주막 같은 인연이 있는가 作 : 허광희
그대 흐린 날 주막 같은 인연이 있는가.
참 시근도 없이 살았더라. 실눈 떠 손바닥으로 해 가리며 오면 오고 가면 가는 인연인 줄 알았더라. 분꽃씨만한 철이 드니 그제사 알았더라.
언제 마음자락 풀어헤쳐 귀 기울여 본적 있는가. 언제 온 가슴 끓이며 토닥거려 준적 있는가.
지친 날 나레 접어 찾아드는 여인네 품 속 같은 느린 호흡의 아련한 마음 한 켠 때론 청명함 보다 흐릿함이 그리울 제 싸리문 열고 들어서면 잘 익은 감추주(甘秋酒) 단내가 먼저 반기는.
그대여 흐린 날 주막 같은 인연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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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돌아보니 참으로 바보처럼 살았더라.
잡을 수 없는 빛을 좇아 맨발로 한겨울 칼바람이 이는 들판을 헤매이다가,
비로소 내 눈을 멀게 한 그 빛이 환영인 것을 깨달았어도.
나는 다만 차가운 눈발이 휘날리는 그 길 위에서 가슴을 쓸며 눈물을 삼키고.
이미 멀어비린 눈,
더듬거리는 몸뚱이를 끌고 정처 없이 들판을 헤매었더라.
어리석은 내가 무엇을 찾고자 먼 길을 떠나왔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 까맣게 지워내고,
방황하하는 내 걸음이 허허로워 그저 웃었더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처한 것.
그대가 그리워, 그리워 헛걸음인 줄도 모르고 그저 내딛은 길.
이제와 새삼스레 주저앉아 울고불며 누구를 붙들고 원망을 해본들 무엇이 달라지랴.
나는 울 수가 없어서 그저 웃었더라.
그렇게 영영이라도 그치지 않을 것 같던 한겨울 들판의 칼바람이,
어느덧 거짓말처럼 멎었을 때,
푸릇푸릇한 연두 잎 여린 속살을 내보일 때 그제 서야 알았더라.
나는 그저 내 마음에 눈이 멀었던 것일 뿐,
고개들어 그대를 온전히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 나 두 번 다시는 그대를 찾지 않을 것이나.
들판에 불던 매서운 바람 그치고 꽃피는 봄이 왔다가
어느덧 연초록의 여름이 깊어가는 것처럼 ,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될 우리 생(生)의 사계(四季)가 짙어지면.
내 생의 끝자락 즘에서 감추주(甘秋酒)를 담구고,
두둥실 떠오를 만월(滿月)을 벗삼아 오직 그대를 위해 건배하리.
그렇게 일평생(一平生)
그대를 그리다 눈 감을제 그때라도 늦지 않았다면.
내가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 그대의 마음,
바람결에 실어 먼 길 떠나는 내 빈손에 쥐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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