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태어나서 큰 의미를 찾아야 비로소 크게 이루어지고 거기서 더 찾아가야 비로소 하늘에 닿는다? 아니야. 왜 위로만 가? 물은 중력대로 사느라고 밑으로 내려가.
인간의 모든 오욕, 마음의 사계들을 다 끊고 자꾸 연마시켜서 하나의 작대기를 없애야 비로소 커지는 거야. 더 정진하고, 사람의 손때가 묻고, 이게 질감이고, 정감이구나 할 때에야 사람이 되는 거라고.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라고. 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나서 크게 되려고만 생각해. 이미 다 가졌는데.
-배우 최민수 인터뷰 中에서- |
오늘 조금 이른 퇴근을 하다 말고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파랗고 또 파랬으며,
내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내듯 낡고, 불퉁하기 이를데 없었다.
고르지 않은 길위를 뛰다시피 걷는 작업복 차림의 장정들, 미로 같은 골목길로 큰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그날 사들인 물건인 듯 양손 가득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어딘가로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하얀 담배 연기를 벗삼아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거나 스치듯 지나는 길목에서 간단한 목례를 주고 받는 사람들.
좀처럼 잘 웃지도, 타인에게 친절하지도, 그다지 친근하지도 않지만,
특정 분야에 조예가 깊거나,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로 길이 보이지 않는 기술 문제에 답을 주거나,
산업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어떤 대화를 해도 막힘이 없는 분들이 상주하는 기술의 집합체.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이고, 고객이고, 직원이고 대부분이 작업복, 혹은 허름한 차림새로 뛰어다니기 바쁜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내던져진 나는 한동안 멍하고, 또 멍하고 멍하기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수와 고객이 나누는 대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도 알지 못해서,
동네 축구공마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던 것도 꽤 여러 번이었다.
그 암혹 같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일을 손에 잡게 되었 때 제일 처음 보였던 것은 매장에 오는 사람들이었는데.
옹이진 손, 때 묻은 작업복에 뒷굽이 닳은 슬리퍼를 신고왔던 손님은 강남에 건물 몇 채를 가진 알부자였고,
머리에 까치집을 진 채로 허둥지둥 물건을 사갔던 손님은 유명 대학교의 연구원이었으며,
운동을 다녀온 것처럼 심플한 트레이닝복에 배낭을 메고 나타나 내가 해주는 설명에 귀기울이던 손님은 대학교수였다.
공통적인 것은 가진 사람일수록 태를 내지 않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겸손했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에 비해서 검소하고 소탈하며, 아는 것에 비해 적게 말하고 외려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분들을 뵐 때마다 내 고개는 절로 숙여지곤 했다.
(물론 진상, 밉상, 우거지상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볼 때는 내가 진상일수도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않기로 한다.)
글을 쓰고 싶었던 나,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내 깜냥에는 어림도 없는 개소리를 떠들며 자만심에 찬 채 세상을 발아래 두고 깔아뭉개던 나,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거나, 하지 못했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현실에 울화가 치밀던 나는,
거칠고 투박하며 때로는 날카롭기까지한, 그러나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분들과 함께 나이가 들고 또 성장했다.
이 일은 여전히 내 꿈이 아니고, 내 바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루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세상의 빛을 보고 태어난 길,
무지렁이처럼 살지 않고 제법 사람구실하며 내 밥벌이는 하고 지내니 얼마나 다행인가.
꼭 이름난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도, 만인이 머리를 조아리는 권력이 탐났던 것도 아니니,
그저, 나로 살다가, 나로 가고 싶었던 이 길에서, 이 한 몸, 흔들리는 영혼이나마 곧추 세워 걸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태어났으니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을 일.
그저,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갈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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