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젊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랑, 그런 것들이 어떻게 해서 한순간에 끝나는 것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황경신 : 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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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간식으로 먹을 과일이나 야채 도시락을 싸서 챙기는데 되도록이면 껍질이 있는 과일은 피하는 편이다.
(껍질을 제거해야 하고 그에 따라 발생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해야 하니 그만큼 수고스럽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도시락을 준비할 때 우선순위에 놓이는 재료는 껍질 째 먹어도 되는 야채, 혹은 세척 된 과일들이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음식(?) 준비조차도 몰아서하는 편이라,
저녁 대신 섭취하는 버섯이나, 매일 아침 먹는 밥은 일주일치를 미리 준비해 일인분씩 냉장, 혹은 냉동할 정도이니,
(자랑할만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라는 인간이 손이 가는 일을 얼마나 성가셔하는지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쯤 되겠다.
그 덕에 줄곧 다른 먹거리들에 밀려나 김치냉장고 한 편에 고이 모셔져있던 배를 마침내 꺼내들었던 지난 밤,
'때가 지나면 상하는 음식이라도 잘 보관하면 먹을 수 있는 건가' 착각할 만큼 외양은 처음의 보관 상태 그대로였다.
(의구심을 품은 채 과도를 들기는 했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배의 몸뚱이를 두쪽으로 나눈 순간이었는데.
온통 까만 멍이 들거나, 심하게 짓무르거나, 새하얀 곰팡이를 안고 있던 음식물 앞에서도 초연하던 내가,
씨앗부분이 완전히 썩어 과육 전체를 새파랗게 좀 먹은 상태로도 여전히 단단하고 멀쩡한 외양을 유지하는 배 덕분에,
그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게도 썩은 과일쪼가리 때문에, 눈앞에서 귀신을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외양이 멀쩡했고, 과육은 여전히 단단하니 혹시라도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상한 곳을 도려냈지만,
(칼질이 조각 수준이라 깊이 도려내는 것은 자신있는데도) 제 아무리 깊이 도려내도 새하얀 속살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기를 쓰며 칼질을 하던 어느 사이엔가 별것도 아닌 상한 과일 앞에서 처참한 심정이 되었던 까닭은.
상하고 썩는 것 또한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 씨앗,
한때의 환하고 해사한 배꽃이자, 탐스럽고 달콤한 과실의 근원(根原)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을지.
저렇게 마냥 놓아두면 상하리라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모른 척 했던 나는,
곯다 못해 상하고 썩어버린 과육의 상태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애써 눈 돌렸던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이대로 모두가 괜찮은지,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난 게 맞는지, 그래서 나는 편안한지, 하여 이것으로 충분한지.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리하여 그 모두를 영원속에 묻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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