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에게 딱 한 번 일어났고, 내 삶은 그 경이로움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는데 바쳐졌지.
그것들은 이제, 시간에 부식된 채, 이후로는 어떤 마법의 주문을 외워도 열리지 않을 내 기억의 어느 골방 깊숙이 들어 있어.
지난 시절의 그 긴 여름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나는 이렇게 자문해보곤 해. "그 여름날들을 빛내던 태양을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까?" 또 이렇게 묻기도 하지. "그 태양은 소리없는 운행을 마치고 영벌(永罰)을 받아 우주의 어느 얼어붙은 창고에 갇혀버린 것일까?"
-장 피에르 밀로바노프 : 엘리아나의 노래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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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오직 태양을 따라서 지구 둘레를 돌고 또 도는 달처럼 너만을 좇던 그 마음은 어디 있을까.'
굳이 잊으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가만히 떠오르는 너는.
작열하던 태양과, 뜨겁게 달궈진 보도블록을 밟고 나아갈 때마다 우리를 덮쳐 숨을 죄던 뜨거움,
맞잡은 두 손에서 축축이 고여 가던 땀방울과, 나란한 걸음에 어깨를 스칠 때마다 소스라치게 전해지던 그날의 열기,
작은 소리라도 내면 이 모든 것이 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놓치면 사선(死線)을 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고집스러운 침묵 속에 서로의 마음을 팽팽하게 놓아둔 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그때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나 빨리 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를 지나쳐 달리던 자동차의 소음과, 푸른 잎사귀를 매단 채 훈풍에 춤을 추던 나뭇잎의 움직임,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횡단보도에 드리워지던 너의 실루엣과, 데일 듯 뜨거웠던 아스팔트의 온도까지,
무엇 하나, 언제까지라도 잊을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에 제 손으로 온마음을 마취해버렸다.
나는 그처럼 너를 소원하고, 소망하며, 또 갈망하고, 열망했으되,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나를 묶어버렸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흔한 자각도 없이 단번에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지독한 광기(狂氣)였을지도 모를 일.
그처럼 미쳐있었던 나는,
무심한 너의 표정 하나, 스쳐가는 눈빛 한 번, 별 의미 없는 손짓 하나에도 가슴을 덜컥이던 나는,
영영 그 시간 속에 박제되어 퇴색되지도, 부식되지도 않고, 언제까지라도 너와 함께 살기를 바랐다.
시간의 퇴적층이 쌓여 나이를 명명하는 숫자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사는 나는, "그 여름날을 빛내던 태양을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까?" 자문하며,
"그 여름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았다면 너는, 나는, 우리는 끝내 행복했을까?" 덧없는 질문을 꺼내보기도 한다.
너는 내 생에 단 한 번,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간절히 염원했던, 세상이 명명하는 모든 의미를 초월한 유일한 존재.
네가 나무라면 헐벗은 가지를 따스히 감싸는 나뭇잎이 되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색의 옷을 선물하고,
네가 별이라면 언제까지라도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기꺼이 까만 어둠이 되어 그 곁을 지켰을 텐데,
내가 바람이라면 찰나의 숨으로라도 네 안에 머물러 단 한순간이나마 온전히 너를 어루만졌을 텐데.
그렇게 너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나는,
그처럼 간절했던 바람은 나로 하여금 기꺼이 너를 보낼 수도, 기어이 너를 떠날 수도 있게 해주었고,
그 소망은 벼랑 끝에서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다만, 이렇게 덤덤하게, 숨 막히게 아프지도, 가슴 저미도록 슬프지도 않게 네가 떠오를 때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처럼 간절했던 마음들은 그 간절함을 이유로 영벌(永罰)을 받아 우주의 어느 얼어붙은 창고에 갇혀버린 것인지,
그 누구를 사랑하거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 삶은 이제 내게 다시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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