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내 마음을 오롯이 보여줄 수 있다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온전히 전해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당신과 나는 지금 함께였을까.
-Betty : 無題-
연락을 받고 걱정이 된 양 사장이 매니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호텔 룸에 찾아갔을 때,
난장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지용은 차분한 모습으로 탁자에 앉아 룸서비스로 온
채소 덮밥과 등심스테이크를 야무지게 챙겨먹고 있었다. “지용아, 너 괜찮은 거 맞니.....?”
지용이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아연실색한 양 사장을 마주보나싶더니 금세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깨까지 으쓱 한다. “괜찮은 거 맞느냐니까 안 괜찮아야하는 것 같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생긋 웃나 싶더니 다 식은 것 같은 등심스테이크를
크게 썰어 입에 우겨넣고 우물거리다 사례가 들려 애를 먹는다. “지용아, 좀 천천히 먹어.”
“아까 형이 시켜줬는데 양껏 못 먹고 잤더니 허기가 져서요. 맛있는데 대표님도 드실래요?”
둘이 있을 때는 사장님이나 대표님이라는 호칭대신 형이라 부르며 어리광을 피우기도 해서
종종 주의를 주곤 했던 지용이, 부드러우면서도 범접할 수없이 깍듯한 음성으로 대표님이라
칭하는 것은 양 사장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권지용!! 너 지금 되게 어색해! 알아??”
양 사장의 말을 듣고는 더 환하게 웃는가싶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넘기는 지용이다.
“울 수는 없잖아요. 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웃기라도 해야죠. 안 그러면 살겠어요?”
야, 이 자식아.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너 내가 피 말라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표정이 어두워진 것도 잠시, 이내 눈을 반달로 접어가며 예쁘게 웃더니 자신을 끌어안는다.
“형, 제가 그동안 많이 속 썩였다는 거 알아요. 그때마다 형이 애써준 것도 알고요. 그래서
더는 안 그러려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저는 무조건 괜찮을 거니까 회장님도
저한테 협조해주셔야 됩니다. 아셨죠? 이제 섹시한 에이스 G-Dragon으로 돌아갈 거니까.“
괜찮을 리 없는데, 아마 만신창이가 됐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며 자신을 안심시키는 지용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더 몰아붙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등을 토닥여준다.
아니 어쩌면 지용이 저를 향해 ‘형돈 형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 거 아니냐.’고 따지지 않아서
안심한 마음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기 원한다면 보이지 않는 척 동조해주는 게,
지금의 지용을 위해서는 더 나은 일일 수도 있겠다는 자기합리화가 양 대표를 침묵케 했다.
함께 돌아가겠다는 양 대표를 애써 만류해 돌려보내기 바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지용이
변기에 얼굴을 대고 목울대로 겨우 넘긴 음식물을 게워냈다 식도를 역류하는 신물이 쓴물로
바뀌고 창백하던 얼굴이 붉어질 즈음 토사가 진정됐을까. 세면대를 짚고 겨우 몸을 곧추세운
지용이 거친 손길로 수도꼭지를 올리고 차가운 물로 입술을 문지르다, 무심코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본다. 예전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제 불행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실소가터진다.
‘그래, 솔직할 수 없다면 위악이라도 부리자. 여기서 울면, 울어버리면 나는 무너질 테니까.
그럼, 형을 붙잡으러 달려가고 말테니까. 그건 안 되니까 나는 괜찮아야만 해. 괜찮을 거야.
힘든 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 내 몫이야.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선에서 끝내야해. 그래야 돼.‘
담당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재산상태를 최종적으로 파악한 형돈은 부동자산을 아내의 앞으로
이전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현재 유동 가능한 현금과, 아직 남아있는 부채를 서류화시켜서
이메일로 전달받았다. 지용을 두고 돌아 나와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제일 먼저 서둔 일이
재산정리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하나둘씩 제자리, 혹은 원하는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인간이면 이거라도 해줘야지. 나 하나 좋을 거라고 내 새끼 낳아준 여자 마음을
난도질 해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식까지 나 몰라라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라도 속죄해야지.
주변사람 상처주고 잘 살수가 없는 나라는 인간이, 혼자 잘살아보겠다고 발악했으니 어쩌면
다 잃는 게 맞을지도 몰라. 그게 아이든, 아내든, 설령 지용이 너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겠지.‘
형돈은 웃어보려 애를 썼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이내,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는 깨닫는다. 사는 동안 내내 이제 더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너를 잃고, 나를 잃고, 마음을 잃었음을. 평생 나는 내 마음을 속이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방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몇 번을 더 주저하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신을
어렵사리 거실로 불러낸 남편이 말없이 서류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좋지 않은 예감에 밀봉된 서류를 뜯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맨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이미 종이의 한쪽 면이 빼곡히 채워진 이혼 신고서, 그리고 제 명의로 이전 된 집과 건물의
등기부등본, 거기다 생활비조로 쓰는 통장에 적지 않은 액수의 현금까지 입금 되어 있었다.
마지막장에는 현재의 부채리스트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부분은 남편이
상환하는 것을 골자로 해서, 쌍둥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일체의 양육비를 지급한다는 조항이
명기된 세부 합의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다분히 진심이기는 했으나, 저의 모든 요구사항을
단 1%오차도 없게 정리해놓은 모양을 보자니 기가차고 허탈한 마음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8년 세월도 별거 아니구나. 서류 한 장이면 끝날 거, 그간 애면글면한 내가 바보였네......”
“유라야, 그러지마.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이것뿐인 것 같아서...... 내 탓이다.”
“잘못한 건 아니? 네 탓인 건 알아? 아는 인간이 이렇게 쉽고 간단해! 너만 정리하면 다야!
혼인관계 청산하고 재산 내 앞으로 돌려주면 네가 저지른 죄가 덜어질 것 같니? 그럼 끝나!
최선? 최선 웃기고 있네. 너 나한테 미안하긴 해? 아니, 네가 나한테 상처준 거 알긴 아니?
난 아직도 네가 G-Dragon사랑한다고 지껄인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런데
너는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핏줄 나한테 퍼 넘기면서 돈이나 몇 푼 던져주면,
내가 입 다물고 애나 키우면서 적당히 넘어가줄 줄 알았어?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혼을 해!
내가 네 피를 말릴 거야. 안 되면 갈아 마시기라도 할 거라고! 어디, 너도 두고두고 당해봐!“
“유라야, 그런 거 아니야. 나 그 애랑 완전히 정리했다. 이제 정말 두 번 다시는 볼일 없어.
이번 일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신한테 뭐든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혼을 하든
안하고 같이 살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든, 난 당신 의견을 무조건 따를 생각이니까......“
“등신 같은 놈......”
“......”
“그렇게 쉽게 끝날 거, 결국 이렇게 코 빠트리고 쳐 앉아있을 거 그 난리바가지를 친 거니?
조강지처도, 지 새끼도 나 몰라라했는데, 허무하게 벌써 이러면 안 되지. 왜, 막상 겪어보니
눈 먼 사랑이 생각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나보지? 이거, 웃어야 돼, 울어야 돼. 아니, 아니지.
내 입장에서는 깨춤이라도 춰야 되나? 고작 이렇게 끝낼 거, 이렇게 돌아올 거, 왜 그랬니?
결국 이럴 거였으면 조금만 참지, 아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말지. 왜 그랬냐고 등신아!!“
사랑인지, 미움인지, 화가치미는 건지, 안도한 것인지 모를 감정들이 일시에 밀려와 그녀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혼란스러운 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녀는 서류를 구겨 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쾅’소리 나도록 방문을 닫은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뜨거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고, 지금의 내 모습이 그 선택에 대한
결과라면 더는 무엇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여기서 더 나빠질 것이 남아있느냐고 하늘에
대고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최악인 것은, 약해진 남편의 모습에 흔들리는
제 마음이었다. ‘불쌍하고, 불쌍한, 어리석고, 어리석은 인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Tite : 3인칭의 필요성 Song By : Nell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지 이제서야 우리가 보일 것 같아 |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건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무수한 날들이 자신을 스쳐 지난들
그 어떤 의미가 있을지, 햇살은 쨍하고 하늘이 푸른들 세상 아름다운 것이 있기는 한 건지,
지용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지우려 밤새 뒤척이느라 충혈 된 눈으로 일에 열중한다.
전화를 걸지 않으려고 번호를 지우고, 혹시나 하는 기대도 갖지 않으려고 자신의 번호까지
변경해놓고도 애꿎은 시선은 조용하기만한 스마트 폰으로 쏠렸다. 연락이 올 리 없다는 걸,
완전히 끝났다는 잔인한 현실을 명징하게 인식하는데도, 자꾸만 전화기를 만지작대는 거다.
제가 먼저 걸어볼 수도 있고, 만약 번호를 바꿨대도 몇 사람만 거치면 금세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쏟아놓은 말의 진위와, 그 사람의 진심이 어떠하든 마지막 만남이후로 철저히, 완전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가장 확실한 대답이라는 생각, 설령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자신과의 이별은 아니라고 해도, ‘형이 자주하던 말처럼 모든 건 행동으로 증명되는 거니까.’
지용은 지끈대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애써 눈을 치켜떴다 모래알에 굴린 것처럼
뻑뻑하기만 한 동공이 뜨끈해지나 싶더니 이내 시야가 흐릿해졌다. 하루에 채 2시간도 자지
못하면서 곡 작업에 온정신을 쏟고, 컴백이나 앞두어야 마지못해 받을까 말까한 고된 PT를
매일같이 하고 있는데도 제 아무리 머리를 비우려고 애써도 생각의 끝은 또 그에게 향했다.
‘지난 세 달간 잊은 듯 살아보려고, 그런 척이라도 하려고, 얼마나 기를 썼는지 형은 알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항상 밝게 웃으면서,
늘 그랬듯, 견고한 일상이 더 견고해지도록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웃는 얼굴, 괜찮다는 대답 몇 마디에 쉽게 안도하며 염려하는 시선을 거두는
주위사람들을 보면서 ‘난 괜찮다.’고 애써 착각했을 것이다. 착각이라도 해야 살아졌으니까.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왜, 뭘 위해 이러고 있는 거지?’
지용은 문득 치미는 화에 작업실 책상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속으로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형, 내가 그렇게 큰 걸 바란 거예요? 그냥, 형 옆에 있고 싶을 뿐인데. 아침에 잠에서 깨면
눈을 뜨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처럼, 그렇게 형 일상에 당연한 존재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어요? 내가 뭘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옆에만 있어 달라고,
옆에만 있으려고 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정말 너무 잔인하잖아.
나는 뭐 쉬웠을 것 같아요? 내가 형 옆에 있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기나 하냐고!‘
번쩍 고개를 들고 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온 지용이 자동차 키를 꼭 쥔 채 달리기 시작했다.
형돈은 신변정리를 하면서, 방송사와 소속사 협의 하에 제가 진행하던 일체의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빠질 방법을 모색했다. 허나, 워낙 갑작스러웠고 그를 대체할 이가 마뜩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는 사이, 주치의에 우려대로 녹화도중 공황장애가 재발하고 말았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고, 그 자리에서 딱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코디의 이름을 부르며 약을 찾았다. 약을 먹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동안 대기실 소파에 쓰러져 있었던 것 같다. 겨우 녹화 장으로 복귀한 후에도 컨디션은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그 자리를 지켰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팬들과 함께하는 방송이었던 탓에, 그는 MC로써의 자질논란은
물론이고, 갖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변명 아닌 변명이라면 양해를 얻거나,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정신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뿐이지만, 그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프로페셔널 한 대처를 하기에는 제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이 있다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방송하차수순을 밟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차라리 잘됐다.’
형돈은 오늘도 침대에 누워 먹지 못하는 밥 대신 영양제를 맞으며 기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은 분명 자신인데, 상처를 준 것도, 지용을 밀어낸 것도 분명히
제가 먼저인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것은 그 아이가 아닌 저였다. 방송스케줄을 소화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서 얼굴은 늘 굳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변했다거나 건방지다는 오해를 사는 일도 비일비재했지만, ‘알게 뭐야.’
혹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에 해명은커녕, 구설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정적으로는 막
살아버리고 싶었지만 아내와 정리가 된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그가 붙들고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제 머릿속에서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며
가슴을 온통 헤집어놓는 지용 때문에, 녹화가 끝나고 녹초가 된 후에도, 술기운을 빌어야만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가 있었다. 공황장애 환자에게 쥐약이나 다름없는 술을 퍼붓다시피
마셔가며 매일을 버티다 보니 자연히 신체리듬이 깨지는데다, 약을 밥 먹듯 거르곤 했으니,
이미 내제되어있는 증상이 악화일로를 걷는 것은 당연했다. ‘솔직히, 정말 살고 싶지 않아.’
형돈은 쓴웃음을 지으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온몸을 들썩인다.
미음이라도 먹일 요량으로 남편이 누운 방으로 향하던 유라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나오는
울음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미음 그릇을 든손이 떨려오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몸을 돌려 걸어와 식탁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내 기분이 왜 이러지.’
GD와 정리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혼서류를 건넨 남편은 그날 이후 매일 새벽 같이 일어나
빡빡하기 짝이 없는 녹화일정을 군말 없이 소화했고, 스케줄이 끝나면 어김없이 만취상태로
귀가하긴 했지만, 그간 부부싸움의 원흉이었던 술주정한번 없이 침대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워낙 타이트한 스케줄 탓에 제가 아침에 깨보면 이미 녹화하러 떠난 후일 때가 많았는데도,
가끔 쉬기라도 하는 날이면 되도록 쌍둥이를 돌보며 그녀가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처음에는 ‘바람피우고, 먼저 이혼하자 해놓고, 꼴에 인간이라고 죄책감 덜려고 쇼하는구나.’
삐딱하기만 한 마음에 곱지 않은 시선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무언의 배려가 쌓일수록,
‘미우니 고우니 해도 애들 아빠고 이렇게까지 애쓰는데 미친척하고 한 번만 눈감을까’ 싶은
마음에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그런 와중에 쓰러졌으니 마음이 짠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죽어라 일하고, 위장에 구멍이 나는 줄도 모르고 폭음을 일삼으며,
쉴 시간이 주어져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저 몰래 울기도 하던 사람을,
망가질 대로 망가져 끝내 앓아누워서도 아프다는 소리한 번 않고 소리 죽여 우는 저 남자를
언제까지 미워하고, 증오해가며 아픈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거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낯선 땅으로 떠난다면, 어쩌면 다시 시작해볼 수도 있을까.’
유라는 괴로운 마음에 식탁에 엎드려 눈물을 쏟는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정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오답을 피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고민과 고통을 피해갈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저 어떡해야 돼요.’
자신의 애마에 올라 시동을 걸기 무섭게 형돈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한 번 울리기 바쁘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혹시나 싶어 다시
시도해보았지만 역시나 같은 안내가 흘러나왔다. 길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수신거부’라는
결론에 도달한 지용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침묵과 수신거부, 조합 최고네.’
문득, 제 안에 꾹꾹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펑’하는 굉음과 함께 터져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 사람 하나면 된다고 자신이 지켜온 원칙도 져버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눈 돌려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곁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토록 절실했던
제 마음이 이토록 간단하게 무시당하고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씩 이성이 날아갔다.
‘형, 정말 잔인하다. 태연한 얼굴로 상처주고, 고집스레 침묵하더니, 확인사살까지 시키네.’
끊임없는 생각으로 어지러운 사이, 지용의 차는 자신도 모르게,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다.
액셀을 밞은 발에는 점점 힘이 가해졌고, 자연히 계기판의 속도는 끝을 모르고 올라가지만,
엔진소리가 사나워질수록 지용의 머릿속은 텅 비고 있었다. 더는 괜찮은 척 애쓰고 싶지도,
기를 쓰며 버티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사랑하다가 끝내 버림받는 일들이,
그 지리멸렬한 반복의 알레고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형 더는 못 버티겠어......’
지용은 액셀에 놓인 발에 더 힘을 가하며 중앙분리대를 향해 돌진했다. 마지막 순간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던 것도 같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도 서지 못한 차가 빙그르 도나 싶더니,
차체가 뒤집어지며 가해지는 엄청난 충격에 지용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제 다 끝났구나.’
의식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기묘한 안도감,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네.’ 지용의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걸린다. ‘나는 형을 잊을 수가 없는데, 기억하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이제, 더는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까 잘 살아요.’
지용이 의식을 놓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두를 지워내기라도 할 것처럼.
이 글을 쓰는 동안 새삼스레, 저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부, 그것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좋아하고 또 원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내세울만한 무언가를 가진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요.
농반 진 반으로, 키 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말해도 그건 표면적인 부분,
제 마음에 두면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을 지닌 존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바보가 되어 버리고,
현실적으로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는 법’을 고민할 때보다, 글 쓸 때 에너지가 넘친다는 걸,
‘나라는 사람은 결국 이런 존재구나.’라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 아이들이 서로를 할퀴는 대신 끝내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이 전부인 바보들.’, 이 아이들의 얼굴을 통해 여전히 순수하고 어리석은 저를 보네요.
안타깝고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2016年 08月 16日 Am 02:13-
지용이 의식을 놓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덧
덧말 :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마음과, 위로할 수 없는 고단한 하루 위에 부디 고요한 평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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