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Life/그녀의 레시피

[요리와 인생]크로크무슈와 토마토 마리네이드&엔초비 파스타.

Betty1983 2018. 8. 30. 12:01







(보통 많으면 세 가지였는데) 지난 시간에는 무려 네 가지 메뉴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수강생들이 열성적이라 강사님도 덩달아 신이 나서인지 사이드로 케이준치킨까지 튀겨서 곁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간단한 튀김도 밀가루, 계란 물, 빵가루를 거친 뒤 다량의 식용유까지 사용하니 뒷정리가 만만치 않다.)

 

식빵에 베샤멜소스를 바르고 햄, 체다치즈, 피자치즈를 올린 뒤 오븐에 굽는 따뜻한 샌드위치인 크로크무슈와,

삶은 토마토의 껍질을 벗긴 뒤, 분량의 소스에 절이면 되는 마리네이드는 비교적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조리와 정리를 마치려면 요령이 필요해서 과정의 선후를 판단한 뒤 시간을 분배해야 하니,

왕 초보에 아마추어인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상황이라 시작 전부터 살짝 당황했다. 


수강생들이 두 가지 요리의 조리를 마치면 그 다음 조리를 하기 전에 강사님의 시연이 있기는 해도,

용량이 풀인 머릿속, 진즉부터 시간이 촉박한 것을 인지하고 있는 마음상태로는 '아, 어쩌지.'하는 생각만 들어서,

(나를 오래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클래스에서 가장 밝고 말을 많이 하는 축인 내가 할말을 잃었다.


(낯설고 불편할수록 더 밝아지고 말이 늘지만 내게 있어 그 언어들은 지나고 나면 그뿐인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마지막 사이드 메뉴인 케이준치킨을 튀기는 동안 나는 그렇게 본연의 침묵을 찾았고,

'수업종료 전에 정리를 마치려면 이 망할 안심이 익어야하는데 왜 이렇게 허여말건 한 거야?'라는 생각에 꽂힌 채,

지글거리는 기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어느 시점부터 정말 뜬금없게도 라홀트니부어의 기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게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바꾸는 용기를 달라던,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던 성직자의 기도를 튀김요리 하다가 읊조릴 줄 난들 알았겠냐마는.

(이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닭 튀기다 양계장 가는 소리지만 머리로 알던 것을 깨닫는 순간이 이렇게 왔나싶다.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생각.

팔이 빠져라 저어대던 베샤멜소스의 농도가 적정해지는 때, 지글대는 기름속의 닭이 노릇하게 익는 때처럼,

(평생 안 올 수도 있지만)내 상처가 아물어 어지러운 마음에 평온이 깃드는 시기도 적정한 때가 있지 않을까.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상처에 생사여탈이 걸릴 만큼 매번 더 없이 취약한 나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너의 독단, 제멋대로인 태도, 내키는 대로 쏟은 뒤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에서 단 한 장뿐인 엽서를  내게 보낼 만큼 세상 어디에서,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떠올리는 너를 사랑하듯이,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반복하고(염려스러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면)매번 도돌이표를 찍는 당신의 답 없음에도,

'듣는 이보다 고민하는 사람이 지닌 무게가 훨씬 무겁고 깊은 거지. 그 버거움을 누군들 알까.'하며 이해하듯이.


여전히 서툴러 요리에 익숙해지지 못해도 매순간 나를 성찰하며 깊은 사람이 되는 나만의 레피시를 갖게 되기를, 

 누구를 만나도,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나는 나고, 사람이 부치고 피곤해도 나는 진정 그들을 아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