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아홉 살까지 作 : 정성수
아픈 아홉 살까지 살 것이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저녁이면 아내와 함께 늙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소스라치듯 새벽에 깨어나 몇 줄의 그리운 시 쓸 것이다
사람에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 그림자가 될 것이다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자주 몸서리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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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는, 아니, 건방지게도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죽을 용기까지는 없어서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독한 짓은 벌이지 않았지만.)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숨이 다해 모든 것을 뒤로하면 차라리 편안할 것이라 믿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고, 만사에 번뇌할 필요도 없으며,
(삶은 귀중하고 사람은 고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순간 시궁창에 쳐박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고,
살아있는 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오늘 보다 내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지 않아도 되며,
웃고 싶지 않은데 애써 입꼬리를 올릴 이유도 없는데다, '나는 왜 사는가' 같은 주제로 골 썩을 까닭도 없을 테니까.
이런 글자들을 적는 나를 향해 '팔자 좋으니까 저런 고민이나 하고 있지.' 혹은 '왜 저렇게 부정적이야?'
당신이 내게 던질지도 모르는 차가운 눈길을 알면서도, 이런 소리를 떠드는 까닭을 묻는다면 나는 그저 쓰게 웃겠지만.
명줄이 질긴 건지, 아니면 오지게 운이 좋은 것인지, 어찌저찌 아직까지 살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아진 것은 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지척에 드리워졌던 죽음의 그림자가 나의 의지와는 완벽하게 무관했던 것처럼,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면서 겪었던 소소한 사고들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남았던 것처럼.
삶이란,
내가 살고자 한다고 뜻대로 살아지지도, 마침표를 찍는다고 마음대로 끝나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세상이 말하는 꿈과 조금은 다른 색(色)의 꿈을 품었다.
조금 더 많은 책을 읽고, 좀 더 먼 길을 걷고, 좋은영화를 보면 기꺼이 되새길 수 있는 사치를 누리면서,
햇살 좋은 오후가 찾아오면, 고운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는 아름다운 꿈을.
가장 사람다워 사람에 가까운,
그러한 사람의 마지막 그림자가 될 때까지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자주 몸서리치면서,
나는 그렇게, 내가 살아있는 한 오래도록 당신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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