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y's Review/내게로 온 문장

[문장이 내게로 올 때] 당신은, 나는 무엇이었을까.

Betty1983 2017. 4. 16. 00:55









한때는 껌을 씹던 젊은 미군이었을 할아버지들과,

한때는 그 미군들의 지갑 속에서 원피스를 입고 웃던 처녀였을 할머니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몇대 서 있고 스타벅스 커피점과 미국식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

모조훈장을 파는 가게들 앞에는 그런 할아버와 할머니들이 혈색 좋은 얼굴로 천천히 걷고 잇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스로를 해방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자부심과 느긋함이 어려 있었다.

누군가가 살육당한 곳이 이제는 추억의 장소로 변해버린다.

세월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마약이다.


-공지영 : 네게 강 같은 평화 中에서-





누군가가 살육당한 곳이 관광지로 변모해버리는 것처럼,

당신에게서 지나가버나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추억거리, 그도 아니면 한 존재를 돋보이게 할 전리품쯤 되려나.

당신이 작정하고 미화한다면, '정말 사랑해서,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보냈다. 모든 게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

당신이 가벼이 구전(口傳)을 퍼뜨린다면, '외로워서 잠깐 놀아보려고 꼬셨다. 골 때리기 전에 치워버렸다.'정도일까.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마음이었든)한 존재가 내게서 등을 보이는 순간 아물길 없는 상흔을 입고 만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처럼 쉬이 잊거나, 점차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의 서랍에 쌓여 덜어내지 못하는 짐이 된다는 것을,

(당연하고도 다행한 현실이지만) 이런 나와는 별개로 나를 떠난 이는 잘 지내리라는 것을 예측한 덕분일 것이다.


내가 유별스럽게 마음을 앓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허나, 요즘 같은 세상에 살면서 (내 나이 또래의사람이) 나처럼 순수하게 사고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 분명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겠지만, 이해받을 생각도 없음으로 나는 이렇게 물을 수도 없는 물음을 곱씹는다. 

당신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어떤 대답을 하고, 또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한사람이 한사람에게 갖는 무게가 그리도 가벼울 수 있는 거냐고,

사람이 어떻게 그리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는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캔 커피를 따는 일보다 수월한 것인지,

 내게 보인 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는지, 아니, 진실이라는 것, 진심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는지,

나는 더 없이 원론적이고, 근본적이며, 고리타분하고,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물음들만 애써 삼키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우리가 만난 적은 있었는지, 당신이 언제 내 삶에 있기는 했는지, 아니, 당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찬연한 벚꽃도, 달콤한 딸기도, 바스락대던 구스다운 이불과, 내 말 한 마디에 규슈여행을 계획하는 너까지도,

당신의 부재 앞에서 완연한 기쁨을 잃고 슬픔으로 퇴색 되어 한숨이 되고, 눈물이 되고, 불면의 밤이 되는데.


내 영혼이 죽어진 자리가 당신에게는 가벼운 애기 거리가 되고 대수롭지 않은 추억이 된다면 슬프겠다고.

당신의 존재가 내게는 차라리 거짓 같을 만큼 여전히 생생한데 그토록나 아무것도 아닌 이름으로 불린다면,

고작 추억 따위가 될 거였다면 내손을 잡으려할 이유도, 또 애써 놓을 까닭도 없지 않았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