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作 : 이훤 나를 가장 사랑하지 않았던 건 나였어요. 혹독히 몰아냈죠. 질타하고 배척하고 매일 나는 나의 바깥에 있었어요. 이방인이 되어 살았던 거예요 나에게. 밤마다 잊힌 국적을 되찾으러 가요. 말해줘요.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나는 나에게 가장 먼 경계였다고. 웃는 날이 많아질 것만 같아요. |
알고있다.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들고 버티는 나는, 나의 절대적인 아군이자,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에게 좀처럼 너그럽지 못하고, 실수를 인정하되, 그 실수를 한 나를 용서하지 못해서 끊임없이 화(火)를 낸다.
('그 불길이 타인을 향하면 차라리 낫겠다.' 생각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다비공양처럼 스스로를 태워도 끝이 없다.)
나 혼자 세상 짐 다 짊어진 것처럼 청승 떨기 싫어서 말보다 침묵을 택한 것, 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웃었던 것,
'관심종자도 아니고 몸 좀 아픈 게 뭐 대수냐.'며 통증을 무작정 참고 넘겼던 것도 내게는 독약보다 더한 형벌이었을 거다.
아프다고 말하면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을까봐, 소리 내 말하면 무작정 주저앉아 울면서 누구라도 원망할까봐 입을 닫았다.
매순간 나의 자아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매번 나의 바깥에서 스스로를 관찰하며 혹독하게 견뎌왔던 나는.
결국, 나는 나 스스로에게 가장 먼 경계였다는 생각.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만큼 밀어내고 배척하며 좀처럼 마음에 차지 않는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 자신의 고향이면서, 더 없이 낯선 타향이었던 나는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될지언정 나약해지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남들과 다를 수 있다. 선택의 순간마다 실수할 수 있다.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샤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다만, 그 대상이(내 기준에)나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고, 바보 같은 실수가 반복되어 잘못이 되는 것이 정말 싫을 뿐.)
웃는 일이 많아질 것 같지는 않아도 조금만 내려놓자.
나는 여전한 어린아이, 혹은,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여자, 그 무엇이라도 찬연히 빛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자.
무엇하나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지만 단 한순간도 비겁하지 않았던 나를 기특하게 여기자. 나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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