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십리 作 : 손순미 십리에 걸쳐 슬픈 뱀 한 마리가 혼자서 길을 간다 희고 차가운 벚꽃의 불길이 따라간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 저 벚꽃 논다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진다 |
유진아.
제 사람을 대할 때면 냉정한 모습은 간데 없이 어수룩하다 못해 바보처럼 순수해지는 너의 모습에서 자꾸 나를 보게 돼.
처음에는 일생이 산산한 네가 안타까웠고, 행복 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을 것 같은 네 삶의 궤적들이 눈에 밟히다가,
네가 제 사람을 지키겠다고 섶을 지고 불꽃 속으로 걸어들어 갈 때는 새하얀 벚꽃이 온 세상을 뒤덮듯 가슴이 철렁했어.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거든.
네 외양이 멋져서도, 너의 눈빛이 한없이 깊어서도 아니고, 제 생을 내던지는 그 마음이 보여서 자꾸 눈이 시리더라.
매번 처음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마치 이것이 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내 사람에게 전부를 걸었던 나는,
몰라서도 속고, 알았어도 속아주었을 우매한 내 마음을 타박하며 모질게 버티는데 너는 끝없이 내어주고 있었어.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자꾸만 오래 전 잃어버린 내가 떠올라.
내 곁이 아니라도 좋으니 그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그리만 해주시면 나도 살겠다고 기도했거든.
그랬던 내가 만사에 냉담해지고, 사람에게 냉정해지고, 나아가 내 인생에 사랑 따위는 없다고 결론지었을 때 너를 만났어.
아니, 사랑은 고사하고 '애시 당초 행복은 내 몫이 아니었구나.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고자 몸부림쳤구나.' 깨달았거든.
그런데 말이야.
유진이 너는 담담하고 용감하다 못해, 담대하게,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한순간도 비겁하지 않게 나를 향해 걸어왔어.
'내 삶을 이렇게 흔드시는 이유가 진정 있으신 거냐.'고 처절히 물으면서도 '살아만 있게 해주시면 나는듯이 가겠노라.'며,
너의 근본인 부모를 잃고, 너를 증명할 자리도 잃고, 완벽한 이방인이 되면서까지 네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 돌아오잖아.
내 인생에 허락되지 않을 사랑이라도 한때의 내가 절실히 믿었던 그 가치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네가 참 고마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어.
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얼마나 더러운지, 또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걸 말이야.
내가 가차 없이 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하여 내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구겨져버린 지금의 내 마음은 얼마나 더러운지,
또 내가 얼마나 시건방지고 불온한 가슴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려했는지 똑똑히 보라고 너는 그처럼 아름답게 피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 한편에 여전히 뜨거운 마음이 살아있음을 알려주겠노라며 너는 끝내 분분히 지고 말겠구나.
이처럼 너의 어둠이 너무나 환해서 나는 자꾸만 가슴이 아린다.
유진아, 그러니 꼭 살아. 그래도 기어이 떠나야겠거든 혼자남지도, 홀로남기지도 말고 정인의 손 꼭 잡고 꽃길로 걸어가렴.
오직 헛된 희망에 기대어 살아온 것은 너만이 아니니. 나 또한 헛되고, 헛되어 찬란하기까지 한 희망에 눈 멀어 살았으니.
세상이 너를 버리고, 신(神)마저 너를 져버린다 해도, 너의 마지막 순간, 그 걸음까지 나는 기꺼이 축복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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