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作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기 마련이다.
대가 댁 영애인 애신을 연모하는 유진에게 그것은 해병대 대위라는 직위로도 가릴 수 없는 노비라는 태생일 것이고,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충격으로 주저앉은 채 저와 눈도 맞추지 못하던 정인과의 허망한 작별은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오는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의 차가운 손에 장갑을 끼워주며 넘어지지 말라 당부하던 유진이니,
떠나려던 마음을 접고 그녀에게 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제게 겨눠질지도 모를 총까지 선물로 건넨다.
(심지어 가르쳐주겠단다. 제 마음에 난 상처도 아물지 않았을 텐데 정인을 위해서 또 다시 위험을 자처하겠단다. 미쳤다.)
본디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마음이라지만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다가,
"어제는 귀하가 내 삶에 없었는데 오늘은 있소. 그걸로 됐소."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진정 완패를 선언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공존하던 어제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오늘은 같은 날이지만 완전히 다른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살지만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영혼의 일부는 이미 소실되어 우주 너머로 흩어졌음을 아니까.
귀하와 도모할 수 있는 그 어떤 미래도 없을 거라며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도,
배움이 빠르지 않을 거라는 대답으로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어달라.'는 애달픈 마음을 넌지시 꺼내놓는 애신을 보면서,
'이 두 사람은 이렇게 밖에 서로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겠구나.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어 다행이구나.'싶었던 것 같다.
(이제와 되짚자니 다 복선이다. 꽃도 반지도 아닌 총이 연인에게 건네는 첫 선물이라니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닌가.)
그곳이 어디든, 그 길의 끝에 누구와 함께든 그저 무사히 어딘가에 닿아서 살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바람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유진임을 알기에 그의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에 그토록 가슴이 내려앉았나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유진의 헛된 희망을 감히 헛되다 말하지도, 쉬이 나서서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잘 가라 손흔들었나보다.
(그 우매한 걸음이 제 생의 모든 걸음이었다 말하는 유진이라서, 그를 위해 끝내 살아남았을 애신이라서 마냥 어여쁘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나의 아킬레스건을 겨눈다면 나는 유진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야.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으니까.'라고 결론을 낸 뒤 새삼스레 유진을 본다.
한때의 나와 지독히도 닮아서 내내 마음에 밟히는 이 사람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짙어진다.
하여 다행이다. 죽은 듯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것보다 더 뜨겁게 한 여인을 위해 스러져서. 그렇게 살아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