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고,
제 아무리 기를 써도 부서지고 고장난 그 무엇은 두 번 다시 온전해질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완벽하고, 완전하게 망가지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껏 그러한지도 모를 일.
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완전하지도 않고, 또 원하는 만큼 망가지지도 못한 나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양극단의 어디쯤에서 여전한 배회를 일삼는다.
이 영화는 내 안의 무수한 얼굴 중 가장 차갑고 신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또 하나의 나를 꺼내들게 한다.
세상 가장 고결하고 잔인한, 잔인하고 고결한 엄마라는 그 이름으로.
"쓸모 없어지면 너도 죽일 거야."
이방인들의 집합소이자, 도박을 일삼는 이들의 종착지이며, 절대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차이나타운.
그곳의 절대자 엄마(김혜수)는 고리대금 물리기는 필수, 장기적출과 살인은 부록, 앵벌이는 옵션으로 여기는 냉혹한이다.
채무자가 빚을 탕감할 목적으로 납치하여 데려온 어린 일영(김고은)을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던진 그녀의 말은,
그녀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의 중심이자 척도이며, 어린 일영이 그녀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절대적인 이유가 된다.
자신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칼로 난도질을 당해도, 그 사람의 피가 제 옷을 붉게 물들여도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는 엄마,
'다 못 쓰게 되었다.'며 태연하게 자신의 수하에게(유일하게 쓸만한)눈 한쪽을 적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녀는,
절대강자의 아우라를 풍기는 동시에, 절대 악(惡)의 현현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이해 되었다.
그녀가 세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렇게 살아왔다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었던 것인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자 얼굴에 주근깨처럼 핀 검버섯, 세월을 따라 히끗해진 흰머리까지 안쓰러이 다가왔다.
서로의 등에 칼을 꽂고 살아남는 차이나타운, 도박 빚에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 버림받고 앵벌이로 연명하는 아이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숨을 쉬고, 부대끼며 살아온 그녀에게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인간다움'은 바보놀음에 불과할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아주, 매우,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녀가 한결 같이 잔인하고, 일관적으로 냉담하며, 마땅히 자생해야 하는 제 삶의 영역 이외에는무관심했기 때문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내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선호하고 신뢰하는 만큼 그 연장선에사람 또한 놓여있는 탓이다.
애시 당초 냉정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차갑고 또 차가울 것,
이미 버렸다면 무언가를 돌이켜보겠다는 헛짓거리 따위는 일삼지 말고 미련이나 회한은 혼자만의 전유물로 간직할 것.
오직 자신의 영역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되, 그런 까닭으로 끝내 외롭고 또 외로울 것.
두서 없이 떠오르던 단어들과 나를 헤매게한 문장 사이에서 문득 그렇게 내안의 내가 서늘한 얼굴을 드러낸다.
"곱배기, 배고파요."
태어나자마자 지하철역 10번 물품보관함에 버려졌다는 이유로 일영(김고은)이라 불리게 된 아이,
가족은 물론, 남들이 당연하게 갖는 호적도 없어서 세상에 존재하되, 영영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이다.
노숙자 무리에서 생존하며 바로 옆에서 피터지는 싸움이 나도 무관심하고 제 허기를 채우는 것만이 최우선이던 아이에게,
자신을 받아주고, 먹여주고, 또 재워주는,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종교 만큼 절대적이었으리라.
엄마(김혜수)의 조직에서 앵벌이로 연명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딘지도 모르는 길가에 버려졌을 때,
돈도, 먹을 것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제 힘으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던 그 순간 이 아이의 첫 마디는,
여느 아이들처럼 '말 잘 듣고, 돈 많이 벌어올 테니 제발 나를 버리지 말라.'는 읍소가 아니라 원초적인 욕구의 표현이니,
'태어날 때 그러했듯, 또 사는 자리가 그러하듯, 이 아이의 삶 또한 이미 결정 되어졌구나.'싶어서 마음이 산산했다.
엄마(김혜수)의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던 일영(김고은)은 엄마의 데칼코마니처럼 잔인하고 냉정했는데,
몸은 자라되, 당최 자라지 않고, 자랄 생각도 없는 그녀의 모습이 나는 역시나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제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이편이고,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저편은 모르고 사는 게 좋겠다 싶었는데,
그런 그녀가 겪는 잠시의 변화, 잠깐의 지진은 여전히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나를 상기시켰다.
"몰라요. 그냥 친절했어."
자신과 똑 닮아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사랑했을 엄마(김혜수)의 기대를 져버린 딸(김고은)에게 뒤늦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인데,
세상의 저편은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던 자신에게 찾아온 생경한 설레임을 말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를 간파한 엄마(김혜수)가 저를 흔들어 놓았던 그 사람을 '네 손으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때도,
명령을 거역한 대가로 낯선 땅으로 강제밀항 당할 뻔 하던 순간에도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리라.
앵벌이로 써먹던 아이들 모두를 길거리로 내칠 때도 제일 먼 곳에 일영(김고은)을 던져놓았듯이,
가장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린 딸(일영)이 자신 보다 더 강해지기를 바랬던 엄마(김혜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
물론 엄마(김혜수)의 방식은 지극히 잔인하고, 평범한 사고의 범주 내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겠지만,
딸(김고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줌으로써(아마도 자신이 그랬듯)그것을 딛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무엇도 설명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았던 엄마(김혜수)의 방식은 딸(김고은)의 동의를 구할 수 없었겠지만,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 내 눈에는 그녀 삶의 고단함과 말할 수 없는 회한이 쓸쓸하게 밟히고 또 밟혔다.
"내가 쓸모 없어졌네."
딸(김고은)을 내칠 때, 그래도 식구 아니냐며 자신을 말리던 수하를 향해 우리가 식구냐 차갑게 일갈하던 엄마(김혜수)는,
조직원들의 분란과 딸(김고은)의 폭주 사이에서 한사람이라도 구해보려던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신의 소용이 다했음을 깨닫고 무덤덤하게 자조하듯 읊조리는 대사로 엄마(김혜수)의 마지막을 예감케 했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 제 엄마에게 그러했듯 딸의 손에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서글픔이요,
쓸모 없어진 존재들을 제 손으로 내쳐왔듯이, 이제는 제가 사라질 때라는 것을 깨닫는 자기성찰의 끝이 아니었을까.
제 딸(김고은)의 손에 최후를 맞는 순간에 "우리 일영이 다 컸네."라고 말하던 그녀는 차라리 행복했을 것이다.
'나를 죽일거냐.'던 엄마(김혜수)의 덤덤한 물음과 '네.'라고 무미건조한 대답을 내놓는 딸(일영)의 모습에서,
보통의 모녀관게를 넘어선, 기이하기까지 한 그녀들의 모든 행동이 차라리 이해 되었다면 당신은 뭐라 답할까.
'나 스스로도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공동(空同)을 당신이 무슨 수로 이해할까.'싶지만.
진즉에 일영(김고은)을 자신의 딸로 입적시키고도,
딸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두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 했음에도 무엇 하나 속시원히 설명하지 않았던 그녀,
'죽을 때까지 죽지 말라던, 이제부터는 네가 결정하라.'던 유언 같은 엄마(김혜수)의 마지막 대사가 나를 뭉클하게 했다면,
충혈 된 그녀의 두 눈에서 차마 말로 할 수 없었을 무수한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이상한 사람인 걸까.
"씨발!!!!!!"
엄마(김혜수)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절규하듯 내뱉는 딸(김고은)의 한 마디인데,
사랑하는 이를 잃고, (적어도 제게는)가족 같았던 존재들을 잃고, 엄마(김혜수)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오해한 상태에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엄마(김혜수)의 무심한 대답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엄마, 왜 그랬어요?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나요? 진짜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일영(김고은)의 무수한 의문은,
외마디의 육두문자와 엄마(김혜수)를 향해 겨누어진 칼날 끝에서 답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딸이 자신 보다 강하게 거듭나고, 거침없이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고 떠났으니 엄마(김혜수)에게도 후회는 없었으리라.
엄마(김혜수)가 자신을 딸로 입양한 사실을 알게 된 일영(김고은)이 담담하게 엄마의 재를 올리는 모습이나,
예전의 자신 같은, 아직 마땅한 이름도, 호적도 가지지 못한 뱃속의 태아에게 눈길을 주는 모습에서,
자신의 엄마(김혜수)와 다름 없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의 방식으로)타자에게 정(情)을 쏟을 그녀의 앞날이 그려졌다.
나는 엄마(김혜수)의 방식이 옳았거나, 혹은 틀렸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 덧붙이고 싶지도 않고 지극히 단순한 흑백논리로 그녀의 삶을 재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삶이고, 그녀가 끝까지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
'그래서 이 영화의 결론이 뭐야? 죽고 죽이는 거야?'라고 말하던 낯선 남자 관객을 뒤에 두고 내가 할말은 없었듯이,
제 몫의 삶을 끝까지 살아낸 사람만이 그 삶에 대해서 평하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엄마(김혜수)가 자신의 딸(일영)에게 바랐던 것은 '죽을 때까지 죽지 않고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타자들이 '죽고 죽이는 영화'쯤으로 치부하는 이야기를 붙들고 몇 시간째 곱씹는 사람이 결국은 나인 것처럼,
내가 엄마(김혜수)를 이해할 수 있거나 없거나 그녀는 딸(일영)의 엄마인 동시에 외로운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슨 거창한 이유나 구차한 설명이 필요한가. 이 사실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은 차고 넘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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